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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Jan 14. 2022

공감하기에 우린 너무 바쁘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일 년 만에 만난 그녀는 어제 만난 듯 그대로였다. 글로벌 스포츠기업에서 마케팅을 주무르고 있는 능력자이자 두 아이의 엄마. 우리는 풋풋한 대학 시절 만났다. 연애 상담과 진로 고민을 나누고 취업과 이직, 결혼 축하 인사를 주고받는 동안 어느새 마흔을 넘겼다. 그녀는 타고난 금수저였다. 아무렇지 않은 듯 툭툭 가족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내가 아는 이름들이 쓱쓱 지나갔다. "사람들이 아빠가 내 뒤를 봐줬다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은 거, 너 알지?" 친구는 주변의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실력을 쌓아 자기 길을 개척했다.


그녀는 여전히 엄청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미국 본사와 화상회의가 잡히는 날엔 새벽부터 일어나 영어로 회의를 준비하고,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면 아이들 방해를 피해 저녁 6시까지 방문을 굳게 닫고 일을 한다고 했다. 전 세계 동일 부서 가운데 업무 강도로는 한국이 단연 최고여서 몸을 혹사한 탓에 병원 신세를 진 것도 여러 번이라 했다. 이른 아침 내게 커피 타임을 내 준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일상을 늘어놨다.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를 했고 새롭게 시작한 내 일에 대해 말했다. 아이들 밥 차려줄 시간 없이, 넉넉히 잠 잘 시간 없이 바쁘게 일한 지난 한 해를 요약정리해줬다. 누구보다 분주한 삶을 사는 친구이니 내 고충을 솔직히 꺼내도 곡해하지 않고 알아주리라 믿었다. 우리의 대화 도중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조용히 흔들렸다. 친구의 얼굴은 20년 전과 다를 게 없었다. 다만 익숙한 그녀의 표정은 기대했던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 내 앞에 앉아 있지만 머릿속으로 다른 일을 생각하느라 분주하구나. 1시간쯤 앉아 있었을까. 갑자기 일정이 생겨 난감해하는 친구를 쿨하게 보냈다. 반갑고 설레는 마음으로 오랜만에 꺼내 입은 코트 자락이 갑자기 거추장스러웠다. 알 수 없이 파닥거리는 마음에 '서운함'이라고 이름 붙이려다 문득 알아챘다.

아, 내가 이랬겠구나.


한참을 일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아이들은 내게 조르르 다가왔다. "엄마, 배가 고파요. 우리 고기 구워 먹을까요?"라며 눈을 반짝였고, "엄마, 혓바늘이 돋았어요."라며 내 앞에서 입을 벌려 혀를 뒤집었다. "엄마, 오른쪽 발바닥이 너무 아파요." "엄마, 제가 시험을 잘 볼 수 있겠죠? 아으, 긴장된다." 사춘기 남자 녀석들이 무슨 말이 그리 많은지 아이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둑 터진 댐처럼 입을 열어 저장된 말을 쏟아냈다. 그럴 때마다 난 공감을 위한 마법의 단어를 건넸다. "그랬구나!" 영혼 없이 입버릇처럼 반응하고 나면 둘째 녀석은 꼭 한 마디를 덧붙였다.

"으이구, 엄마! 또 드문드문 들으시네요!"


아이들이 내게 말할 때 난 분명 듣고 있었다. 다만 내 머릿속엔 다른 생각이 가득 찼을 뿐이다. 귀로는 넣고 있지만 마음에 담아두지를 못했다. 아니, 고백하자면, 공감하지 못했다. 분명 내 배로 난 내 새끼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녀석들인데, 아이들의 아픔과 어려움이 마음속 깊이 헤아려지지 않았다. 그보다 당장 내 앞에 떨어진 일처리가 급했다. 글을 써야 해. 피드백을 해야 멤버들이 퇴고를 한다고. 책도 편집해서 넘겨야 연말에 나올 테고. 머릿속엔 온통 '나', '내 일'이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의 상황을 알고, 당신의 기분을 이해한다’는 게 공감이다. 다른 사람의 상황이나 기분을 같이 느낄 수 있는 것도 능력이어서 우린 더불어 살아가는데 '공감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제 아무리 타고난 공감 능력이 좋아도 너무 바쁘면 상대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려 적절히 반응할 수 없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이심전심할 자리가 없다.


사실 수년 전에도 직장에 매여 일과 가정 사이에서 바삐 오갈 때 가족들을 면밀히 들여다보지 못했다. 남편과 아이들은 내게 고통을 호소했을 텐데 '알았다'라고 대충 듣고는 귓등으로 흘러 보냈다. 일상의 물결이 반복되면 좁쌀만 한 구멍은 시나브로 커져 주먹만 해진다. 그제야 눈에 들어온 구멍을 바라보곤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치기를 얼마나 반복했던가. "대체 이 구멍은 뭐야?" 곁에 선 가족들은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미 말했다고, 그것도 여러 번 말했다고.


뭘 위해 바빴던 걸까 돌아본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삶의 우선순위가 뒤집히면 성실과 근면도 빛을 잃는다. 가장 크고도 중요한 부분을 버려둔 채 작은 틈을 채우겠다고 애써봐야 뻥 뚫린 구멍은 그대로일 뿐. 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은 시리고 따갑다. 공허감과 허무함이 몰려든 자리, 몸은 아프고 영혼은 메말라간다. 아이들을 위해 어미로서 열심히 일했지만 어느 순간 일 뒤로 아이들을 밀어 버린 건 아니었을까. 열심히 뼈 빠지게 일한 이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 가족들과 묵직한 시간을 보내지 못한 걸 후회한다지 않나. 뭣이 중헌디. 새해 아침, 남편과 두 아들 얼굴을 떠올린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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