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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Jan 21. 2022

자네, 쉰다는 게 뭔지는 알아?

새해 카운트다운을 열흘 남기고 쉬기로 했다. 일 년 동안 열심히 일한 뇌에 숨 쉴 여유를 주어야 2022년을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로 속에 갇힌 쥐처럼 제자리를 맴도는 기분, 뭔가 애를 써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듯한 답답함이 때때로 밀려왔다. "잘 살고 있어!", "괜찮아, 그 정도면 충분해." 지인들은 내게 격려와 응원을 건넸지만 난 결코 충만하지 않았다. 딱 한 걸음만 '돌파'하면 퀀텀 점프가 가능할 것 같은 이 느낌. 그러려면 시선의 변화가 필요했다. 벽에 가리워진 눈을 들어 올려 내 일상을 위에서 조망하면 탈출구는 바로 보일 듯했다. 3차원적 시야에 GPS를 다는 방법, 내겐 바로 휴식이었다.


일단, 하루가 흘러가도록 두기로 했다. 시간이 함부로 날아가지 못하도록 촘촘히 계획하던 걸 멈췄다. 까짓 거 갈 테면 가봐. 난 내 마음대로 움직일 테니. 손가락 사이로 시간이 유유히 빠져나가도록 긴장을 풀고 가만히 내버려 뒀다. 노트북을 켜지 않으니 관심사가 흐트러지지 않아 한갓지다. 불필요한 남들 이야기까지 오지랖 넓게 살피지 않아도 돼서 여유롭다. 그들을 보며 쓸데없는 정보로 머리를 채우지 않아도 되니 가볍다. 그런데 간만의 여유로움 사이로 온갖 잡일이 끼어든다는 건 함정이다. 베란다에 빨래는 쌓여가고, 뽀얀 먼지가 바닥에 앉은 게 보인다. 빨래 다 되었다고 세탁기 알람음이 울리면 몸을 일으키고, 먼지를 털고 청소기를 돌리다 보니 밥때가 된다.


일하지 않고 쉬기. 하루 종일 읽고 싶은 책만 들여다보기. 음악 듣다가 책 읽다가 메모하다 졸리면 꼬박 졸기. 그러다 입이 심심하면 따뜻한 커피 한 잔 내려 달달한 쿠키 한 입 베어 물기.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하고 싶은 건 단지 이것뿐이었다. 허나, 내가 하고 싶은 '한량' 놀이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낡은 소파에 앉아 따뜻한 햇살 받으며 나른하게 있자니 마음이 허공에 둥둥 떠다닌다. 시간이 가도록 내버려 두면서도 이래도 되나, 불안하다. 남들은 겁나 바삐 열심히 살 텐데. 나만의 길을 따라 내 방식대로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면서도 좌, 우, 앞, 뒤에 있는 사람들 곁눈질하느라 눈 돌아가는 속도는 가히 LTE급이다. 어려서부터 들어온 '누구네 집 딸은...'이라는 말 때문일까. 다른 이들과의 비교 끝에 열등감이 차오르는 건 언제쯤 끝이 나려나. 이쯤이면 불치병이다.


느릿느릿 여유를 누리겠다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보다 더 잘 쉴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오래간만에 미술관을 갈까, 친구한테 연락해볼까? 서점에 나가 보는 건? 일전에 찍어둔 카페도 있었는데... 쉬는 것조차 '잘', '완벽하게' 하고 싶어서, 무언가를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더 나은 휴식활동을 탐색하고 있다. 아, 황금 같은 내 시간... 어느새, 야금야금 사라지는 시간이 아쉬워 조바심이 인다. '이보게, 쉰다고 하지 않았어? 진짜 하고 싶은 게 뭐야? 그나저나 쉬는 게 뭔지는 아나?'


© sincerelymedia, 출처 Unsplash


일감에 마음 뺏기지 않으려 애썼으나 원 없이 쉬었는지는 물음표다. 책상 한켠에 잔뜩 쌓아놓은 책더미 가운데 읽어낸 것보다 읽다만 게 더 많다. 쉬려고 했는데 뭘 했는지 모르겠다는 푸념과 그 정도면 잘 쉬었다는 자기만족 사이에서, 한가함과 불안 사이에서 요동치는 마음을 다잡느라 더 바빴던 건 아닐까. 분명히 깨달은 사실 한 가지, 쉬는 것도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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