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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Feb 25. 2022

어제보다 못 써도 괜찮아

도서관.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하는 책 사이에서, 이번엔 꼭 읽겠노라 미리 메모해둔 책과 책장 코너를 돌다 우연히 마주친 책 사이에서 매번 고민에 빠진다. 빌릴 수 있는 권수와 읽고 반납해야 하는 기한이 정해져 있다. 서가에서 책을 뺐다 꽂기를 반복하고, 나름 우선순위를 정해 책으로 탑 쌓기를 거듭한 후에 대출 절차를 마친다. 결국 선택을 미뤄둔 책은 이동 선반에 얌전히 두고 나온다. 너희들은 다음에 빌려가마. 남의 손 타지 말고 얌전히 숨어있거라. 다시 한번 눈도장을 세게 찍고 나선다. 도서관을 들르는 날은 이래서 늘 계획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가방 미어지도록 책을 들고 나와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손에 쥐었다. 아직은 차가운 겨울바람에 손끝이 시리지만 하얀 테이크아웃 컵을 움켜쥔 모양새가 꽤 마음에 든다. 마치 할리우드 여배우가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있다가 파파라치에 찍힌 장면처럼 내 모습이 그렇게 보일 거라고 잠시 착각한다. 책도 빌렸고 커피도 들었다. 발걸음이 가볍다.


  보슬보슬 비가 내린다. 아직은 코 끝이 알싸한 게 겨울인데 비 떨어지는 소리가 통통 튄다. 곧 봄이 오겠구나. 비 오는 길, 운전을 하면서 집에 돌아오는데 갑자기 마음에 살랑 바람이 분다. 집에서 도서관까지 11킬로미터. 부족한 시간을 쪼개 일부러 차를 타고 가서 무겁게 책을 들고 왔을 뿐인데 이미 책을 다 읽은 듯, 글을 쓴 듯 충만해진다. 거참, 글이 잘 풀리지 않아 힘들 땐 언제고 내가 하는 글쓰기라는 작업이 날 행복하게 하는구나. 이제 난 집에 가서 읽고 싶은 책을 수북이 쌓아두고 한 장 한 장 펼쳐 내려갈 것이다. 작가의 글을 읽으며 영감을 받아 마구 휘갈겨 메모를 할 테고, 다시 내 글에 녹여낼 것이다.


 계단 오르기를 시작한 지 어느덧 25일이 넘었다. 운동화를 신는 일은 놀라울 정도로 매일이 새롭다. 어제까지 계속 한 일인데 오늘은 유독 하기 싫어 내가 나인가 싶을 때도 있다. 20층쯤 이르면 몸은 이를 기억하고 숨이 가빠진다. 여전히 버겁고 여전히 하기 싫지만 적어도 내가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 건 어제보다 오늘 반드시 더 많이 올라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몸이 무거운 날은 44층도 오르고 가붓한 날은 64층도 오른다. 그 다음날 65층을 기록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다시 40층 언저리로 내려가기도 여러 번이고, 20층에서 멈춰 서기도 한다. 그렇다고 마음이 불편하거나 나 자신을 못마땅해하지 않는다. 내일은 그마저도 못 오르면 어쩌나 불안하지도 않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은 한 꼭지가 술술 써지지만 어느 날은 한 문장 완성하는 게 죽을 것 같이 힘들다. 앞으로 한 발 나아가기는커녕 제자리 지키는 일조차 힘들다. 뻔한 어휘와 유치한 표현, 진부한 이야기에 나날이 퇴보하는 기분마저 든다. 자신을 돌아보고 치유하는 효과가 글쓰기에 있다고 하지만, 너무 쉽게 자주 자책하게 만드는 것도 글쓰기다. 허나,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잘 써질 때도, 안 써질 때도 있다. 글발이 오르지 않는다고 마냥 늪에 빠져 허우적대진 않는다. 그 순간마저, 괴로운 경험마저 우리에겐 글감이다. 만날 승승장구하는 이야기만 있으면 재미있겠는가. 제 아무리 멋진 영화 주인공이어도 완전무결하지 않다. 우린 2% 부족한 이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글쓰기에 좌절하는 순간 떠오르는 생각, 느끼는 감정은 일필휘지의 신통한 능력이 있는 이들은 절대 경험하지 못할 만고불변의 글쓰기 재료다.


  계단을 오르듯 글 쓰면 된다. 버겁고 하기 싫지만 어찌 됐건 어젯밤 글을 썼고, 오늘 아침 뭘 쓸까 고민한다는 것만으로 글 쓰는 이의 일상을 살아내고 있는 거니까. 끊임없이 글쓰기를 생각하며 부릉부릉 글쓰기 엔진을 가동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린 퍽이나 대견하고 기특하다. 글쓰기를 시작한 지 2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깨달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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