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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Mar 04. 2022

헬스 트레이너가 글을 쓴다고?

글 쓰는 사람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편견

급했다. 글쓰기 강의 교재를 발송기로 한 날, 인쇄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출력된 자료를 마구 늘어놓고 파지를 골라내야 하는데 마땅한 곳이 없었다. 우체국이 닫기 전에 해결은 해야겠고, 사람들 북적이는 카페에선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좁은 인도에서 길 잃은 어린양처럼 앞으로 갔다 다시 뒤로 돌기를 반복할 즈음, 휴대폰 가게가 보였다. 빙고!



사장님, 저 잠시 있다가 가도 될까요?


내가 종이 더미를 잔뜩 안고 들어서자 사장님은 잠시 멈칫했다. 그의 얼굴엔 분명히 쓰여 있었다. 누구시더라. 휴대폰 가게에 불쑥 들어가 자리를 요구한 민폐 손님은 당당했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 사장님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 네, 이리 오세요!"


3평이 채 되지 않을 듯한 작은 가게는 좁고 어두웠다. 환한 조명과 하얀 벽, 말끔히 차려입은 직원들과는 거리가 먼 곳. 하지만 있는 듯 없는 듯 수년 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


일 년 전, 휴대폰을 개통하기 위해 한 시간쯤 머물렀을까. 동네 사람들은 구멍가게 같은 그곳에 쉴 새 없이 오갔다. "나, 이거 좀 해줘 봐. 뭘 어디서 해야 하는지 당최 모르겠어." 애플리케이션을 어찌 다뤄야 하는지 난감한 할머니부터 "삼촌, 저 엄마 올 때까지만 기다릴게요."라며 푹 꺼진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 초등학생까지. 그들은 이미 여러 차례, 자신들의 다양한 필요에 따라 그곳을 자주 들르는 듯했다. 사장님은 가게 안에 들어온 이들을 그냥 보내는 법이 없었다. 조그만 시골 마을 동사무소 직원처럼 굳이 자신이 해주지 않아도 될 사소한 요구까지도 흘려버리지 않았다.


정신줄을 놓고 어찌할 바 모르던 상황에서 내가 가게 문을 열어젖힐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내 비록 사장님과 친분은 없지만 다급한 사정을 그는 받아줄 것 같았다. 예상대로 그는 늘 알고 지낸 단골을 대하듯, 불쑥 허물없이 들어간 내게 선뜻 손응대용 탁자를 내줬다.


동네 휴대폰 가게, 손님 응대용 탁자 위에서


그리고는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는 홍반장처럼 뭔가 문제가 생기면 도와줄 태세로 내 옆에 가만히 서서 바라봤다. "아, 사모님, 글쓰기 가르치세요?" 아, 우리 사장님 별 걸 다 알아보시네. 그는 정신없이 손을 움직이는 내게 반가운 듯 갑자기 폭풍 수다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와, 멋있어요. 글도 쓰고 강의까지 어떻게 하세요? 저도 글쓰기 관심 많아요." 오, 사장님이? 우리 동네 휴대폰 가게 사장님이 글쓰기 모임 멤버가 되면 어떤 그림일까. 곁에 서서 자꾸만 쳐다보던 그가 귀찮아지려던 찰나, 마음을 고쳐 먹고 눈빛을 선하게 바꿨다. 그래, 사장님도 글을 쓸 수 있지, 암만.


 "저 아는 헬스클럽 트레이너도 글 써요." 사장님의 느닷없는 한 마디에 나도 모르게 풉, 웃어버렸다. 근육질의 트레이너가 운동복을 입고 땀 냄새를 풍기며 헬스클럽에서 글 쓰는 모습이라니. "운동 관련 글을 쓰시나 봐요."  진지한 그에게 뭐라도 대답해줘야 할 것 같았다. "에세이를 쓴대요. 언젠가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요."


  갑자기 얼굴이 후끈거렸다. 누구나 글을 쓰면 삶이 풍요로워진다고 설파하고 다니면서 난 왜 갑자기 웃음이 터졌을까. 대화는 아무렇지 않게 다른 주제로 이어졌지만 그곳에 있는 내내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헬스 트레이너는 흘려 고객을 응대한 뒤, 자신의 일상을 담담히 적어나갔을 터다. 일하면서 자부심을 느꼈을 때도, 진상 고객을 만나 마음이 부대꼈을 때도. 그런데 난 감히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헬스 트레이너가 글을 쓴다고?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이 말은 누구나 책을 읽고, 누구나 달릴 수 있으며, 누구나 계란 프라이를 해 먹을 수 있다는 것과 동일하다. 소싯적에 글을 써 봤어서, 학창 시절에 공부 좀 해서, 글 쓰는 사람처럼 생겨서, 책상 앞에 앉아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누. 구. 나.


글쓰기 모임을 찾는 많은 이들이 처음에는 스스로 글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글을 쓰고 싶어서, 이왕이면 잘 쓰고 싶어서 강의를 듣고 모임에 참여하면서도 제대로 된 글을 그럴듯하게 쓰는 일은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작가'의 일이라고, '진짜 작가'는 따로 있다고.


그들의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글쓰기 모임 첫 시간에 내가 하는 일이 바로 "당신도 글을 쓸 수 있다!"라고 깨우쳐 주는 일인데. 정작 난 트레이너가 글을 쓴다는 말에 웃어버렸다.  머릿속엔 글 쓰는 사람의 전형이 박혀 있었다. 이토록 위선적이라니.


인쇄가 잘못돼 버렸던 교재


너그러운 사장님 덕분에 급한 불은 껐다. 널브러진 종이를 주섬주섬 챙기는 내게 사장님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모님, 그 글쓰기 모임 저도 나중에 가도 돼요?"  "그럼요! 오세요. 그리고 트레이너님께도 꾸준히 쓰시라고 전해주세요." 얼굴도 알지 못하는 트레이너에게 사과라도 하려는 듯, 미안한 마음을 꼭꼭 눌려 사장님에게 건넸다.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만큼 흥미로운 것도 없다. 휴대폰 가게 사장님이 만나는 우리 동네 사람들, 트레이너가 운동을 가르치며 느끼는 희로애락. 세상 최고의 이야기꾼들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터져버린 웃음은 두고두고 내겐 부끄러운 일로 남을 게다.


사장님, 꼭 글 쓰세요. 잘 안 되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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