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누가 깼을까

약자에게 전가된 책임, 가정에서 시작된 균열

by 발가락꽃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



사실 난 저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 안에서 새는 바가지를 고치지 않고 밖에서 새게 하나?



바가지가 샌다는 것은 바가지의 어떤 부분이 부서졌단 의미다. 안에서 샐 때 이미 고쳤어야 했는데 안 고치고, 밖에서 샌다고 욕하는 이유가 뭘까? 혹은 애초에 집에서 샌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몰랐다면, 안팎으로 욕먹을 일도 없을 터이다.



물론 욕먹어야 할 집안 어른들도 있다. 가정폭력을 일삼거나 폭언을 하는 사람들. 가정 폭력의 경우 피해자들은 폭력에 짓눌려 바깥에 말하지 못하고, 새어 나오는 신음으로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 말을 정작 가장 많이 듣는 건 힘없는 아이들이다.



어떤 아이가 가정 밖에서 반복적으로 문제행동을 한다면, 그 아이는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된다. 일종의 논리적 오류이긴 하지만, 밖에서 새는 바가지의 원인이 안에서도 이미 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많이들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는 ‘안에서 새는 바가지’의 뜻이 ‘원래 그렇게 태어난 아이’와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래서 밖에서 새는 바가지의 원인을 부모의 교육, 애정보다는 아이 자체에서 찾으려 한다.



외부에서 문제 행동의 원인을 아이에게 돌린다면 아이는 ‘난 원래 이런 사람이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고 자존감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미 무언가 손상된 채로 험난한 사회로 나가는 아이들은 처음부터 색안경을 낀 시선들을 마주하게 된다.



가정은 일차적인 보호의 장소, 회복의 장소여야 한다.

즉 자존감은 집에서 형성되고 충전되어야 한다. 집에서 존중받지 못한 자존감은 결국 밖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어떻게 보면 이게 바로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의 의미일 수도 있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학씨 부인이 애순이에게 “귀티가 난다, 귀한 사람 같다”라고 말하는 건 이런 연유에서이다. 안타깝게도 반대의 경우, 즉 집에서 무시당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티’가 난다.



가족에게 존중받고 사랑받으며 자란 사람은 사회에서도 행동의 기준을 잃지 않는다. 자신이 받아 마땅할 대우를 가족의 사랑을 바탕으로 규정하고, 그래서 예의 없게 구는 사람을 멀리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반대로 집에서 존중받지 못한 사람은 사회에서 부당한 미움이나 괴롭힘을 당해도 “나는 이 정도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 여기며 스스로를 낮추고 견뎌낸다.



육아 프로그램을 보면 이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금쪽같은 내 새끼>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보면, 많은 부모가 아이들의 문제를 호소한다. 하지만 대부분 부모의 양육 방식에 문제가 있었고, 그래서 아이를 교정하는 대신 부모를 교정하는 경우가 많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를 탓할 것이 아니다.



그들이 왜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되었는지 봐야 한다. 들추기 쉬운 약자의 잘못을 떠벌릴 것이 아니라, 내부의 강자가 어떻게 바가지를 부숴버렸는지를 봐야 한다.



그래서 깨진 바가지를 동네방네 흉보며 낙인찍기보다는 밖에서 깨져 보이지 않도록 고쳐주는 따뜻한 손길과 보살핌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