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보호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막
예의란 무엇일까?
프랑스어에도 존댓말과 반말이 있다. 하지만 반말을 쓰는 범위는 한국보다 훨씬 넓다. 일단 존댓말로 시작해도 조금만 가까워지면 곧 반말로 전환한다.
어느 날 직장 동료의 험담을 들었다. 그 사람은 집에도 초대받고 함께 밥을 먹고, 사적인 대화까지 나누었단다. 그런데 다음날 다시 존댓말을 하더란 것이다. "나랑 가까워지기 싫나 봐요." 그는 서운한 듯 말했다.
반말은 단순한 말투가 아니다. '너와 나는 가까운 사이'라는 신호다. 격이 사라진 관계, 마음이 오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어릴 땐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 했다. 어릴 적에는 멋도 모르고 결혼하는 게 낫다고들 하지 않던가. 철없던 시절, 격 없이 지내며 마음을 터놓는 관계가 더 진실하게 느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학창 시절 친구들은 격식으로 둘러싸인 사회 속에서도, 언제든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요즘 말로 '스레드의 반말 문화'가 그런 맥락일 것이다. 반말은 우리 사이의 거리감을 없애고, 함께 웃던 시절로 되돌려준다.
첫사랑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잣대 없이, 계산 없는 마음으로 사랑한다. 그래서 더 뜨겁고, 그래서 더 아프다. 그렇기에 모두들 첫사랑이란 단어에, 그 사람의 흔적에 애타게 마음을 쏟는다.
어느샌가 사랑마저도 잣대로 재고, 배려란 이름의 선을 만들기도 한다. 그렇기에 30대 이후 연애는 20대의 연애와는 다르게 헤어짐도 덜 아프다는 이야기가 많다.
사회에서 나이가 어리더라도 성인이 된 이후엔 쉽게 말을 놓지 않는다. 나이 차이가 나더라도 상대가 성인이라면 말을 바로 놓지 않는다. 무리한 부탁도 하지 않고, 멀어질 때도 격렬하지 않다. 그저 서서히 거리를 둘 뿐이다.
왜일까?
마음을 다 열지 않아서일까?
아니, 그보다는 '예의'라는 이름의 거리를 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의를 갖춘다는 건 인간관계에서 서로를 보호하기 위한 공기막을 두는 일이다. 아동 청소년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 사이에 공기층을 만드는 일, 서로 부딪쳐도 깨지기보단 어울려 같이 가는 일. 그것이 예의이다. 마치 깨지기 쉬운 물건에 에어캡을 씌우듯이. 내 마음을 보호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예의'라는 이름의 마음의 에어캡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