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과 자기 연민의 경계
동정은 참 무섭다.
적절하게 필요한 사람에게는 힘이 되지만, 겨우 버티고 있는 사람을 다시 낭떠러지로 밀어버리기도 한다. 무차별적인 동정은 결국 자기 과시의 다른 얼굴이다. 내가 너보다 낫다는 전제를 깔고 던지는 동정은, 상대를 위한 게 아니라 자기 연민을 다독이기 위한 행위가 된다.
20대에는 봉사활동을 꽤 했다. 한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다만 일반적인 봉사라기보다는 재능기부에 가까웠다. 미대생이었기에 장애인 시설, 고아원, 노인 시설에 무료 벽화를 그리거나 그림 수업을 하는 식이었다. 소위 말하는 '힘든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서로 나눔'이라는 말로 이 봉사활동을 이야기했다. 벽화를 그리며, 그림 수업을 하며 나 역시 많은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진짜로 '힘든' 봉사를 열정적으로 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도 있었다.
어느 날, 아침마당에도 나왔다는 유명한 봉사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간 적이 있다. 가던 길은 아니었지만, 함께 봉사하던 언니가 방송을 봤다며 가자고 했고, 나 역시 대단한 사람일 거라 생각해 따라나섰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인사를 나누고 봉사 이야기를 하던 중, 그는 자신의 힘든 과거를 길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18년 전 일이라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어린 시절의 가난, 많은 형제들로 인해 공부를 못했던 이야기, 힘들게 살아온 삶. 그리고 봉사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저렇게 불쌍한 사람들도 사는데, 그 사람들 보면 내 인생이 다행이라고 느껴져요."
그 순간부터 집에 가고 싶었다. 누군가의 불행을 통해 자신의 안정을 확인한다는 발상이 내겐 꽤 큰 충격이었다. 같은 생각을 했더라도 조금만 돌려 말했다면 이 정도로 불편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어 자신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봉사에 쓰는지, 어떤 일을 해왔는지를 한참 동안 설명했다. 마치 트로피를 자랑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물론 남을 위해 삶의 일부를 내놓는 행위 자체는 분명 대단하다. 실제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도 많다. 그렇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하나하나 따졌겠지만 그냥 넘겼다. 봉사를 하며 필요한 사람은 넘치고 손은 늘 부족한 걸 봐왔기에 한 선택이었다. 내 감정 때문에 그 소중한 인력 하나를 꺾고 싶지는 않았다.
그 이후로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주기 전, 반드시 한 가지를 생각한다.
이 행동으로 내가 느낄 우월감이 크다면, 그것은 내가 주는 게 아니라 받는 것이다. 본질이 뒤틀려 버린다. 그리고 주기 전, 그 사람이 정말로 그것을 필요로 하는지 먼저 본다. 준 뒤에는 추가적인 감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게 내 철칙이다.
사람은 가진 게 없을수록 더 자주 자랑하고 싶어진다.
드라마 〈폭싹 속았어요〉에서 애순이는 배를 팔고, 결국 시장 자판에서 오징어를 팔면서도 자식 이야기를 끊임없이 늘어놓는다. 자식의 모든 것을 자랑하며 자신의 자존감을 겨우 붙잡는다.
사람은 비어 있는 부분이 있으면 남을 갈아서라도 자신을 채우려 한다. 그 방식이 동정이 되기도 하고, 자랑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상대가 희생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행동 앞에 대부분의 사람은 그 불편함을 느낀다. 그렇기에 그 사람과 멀어진다.
과도하게 자랑하고 싶어질 때, 불특정 다수를 향해 지속적인 동정을 하고 있을 때, 내 안의 어떤 부분이 무너졌다는 신호일 가능성이 크다. 자동차 계기판에 빨간불이 들어온 것과 같다. 그땐 밖을 볼 게 아니라, 안을 열어 어디가 고장 났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사람들은 고장 난 채로 아무나 들이받는 범퍼카 같은 사람과 오래 지내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