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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름차차 Sep 15. 2022

가장 세밀하게 만든 세계

드라마 <괴물> 김수진 작가, 시크릿 작가노트 2022.09.14

스터디원이 지나가듯 드라마 <괴물> 각본집이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 특히 작가 노트까지 출간되어 있어 구상에 큰 도움이 된다는 말도 더 했다. 3주 전, 도서관에 들렸다가 그 말이 떠올랐다. 각본집 여러 권을 낑낑거리며 대여해 왔다. 첫 주는 일이 몰려서, 지난주에는 코로나 때문에 꺼내 읽어보지 못했다. 겨우 책상에 앉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펼쳐본 책은 드라마 <괴물> 각본집 3권, 시크릿 작가노트였다.



작가는 스토리를 구상하며 세계를 만들어낸다. 캐릭터들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살고 있는 세계. 사건이 발생하고 그것을 추적하고, 갈등하고, 장애물을 겪으면서도 달려가는 세계. 그 세계를 얼마나 치밀하고 세밀하게 그려내는지, 채워나가는지는 작가에게 달려있다. 드라마 <괴물>의 김수진 작가는 내가 본 세계 중 가장 치밀하게 세계를 조각해낸 사람이었다.



침대에 누워 주말 밤, 드라마 <괴물>을 보던 서늘한 그때가 떠오른다. 연기와 연출, 극본에 감탄하며 마지막 회까지 실시간으로 시청했다. 작가와 감독, 연기자, 미술, 음악까지 모든 것이 잘 맞춰졌기에 감탄했지만 극본이 어느 정도로 세밀했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김수진 작가의 시크릿 노트를 펼쳐보며 내가 그동안 얼마나 안일하게 세계를 구상해왔는지 부끄러워졌다.



등장인물의 삶을 정리한 이력서

작가의 시크릿 노트는 등장인물 11명의 삶을 펼쳐놓는 것부터 시작한다. 드라마가 보여주지 않은 등장인물의 전사가 이력서 파일 형식으로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이력서 구성 항목을 뻬곡히 채워 넣었는데 생년월일, 이메일 주소, 전화번호, 휴대폰 번호, 주소, 학력과 키, 몸무게, 혈액형, 종교, 취미와 특기, 가족의 연령과 가족들의 최종학력과 직업, 동거여부가 적혀있다. 그들이 졸업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이름과 졸업 연도, 직업별 경력사항과 자격증까지 적었다. 산부인과에서 출생한 시점부터 드라마가 끝나는 시점까지의 생애와 성장배경, 사건 발생 당시의 감정과 각 인물들에게 품었던 생각까지 쓰여있다. 사건의 구성과 각 인물의 전사를 배우가 이해해야 온전히 그 사람으로 연기할 수 있기 때문에 작가는 이렇게 쓴 각 캐릭터의 이력서를 배우와 스텝에게 공유했다. 책에는 이력서에 사진이 포함되어있지 않았지만 김수진 작가는 사진까지 다 찾아서 이력서 파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정도까지 해야 저런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일까. 책의 첫 부분부터 자세를 고쳐 앉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 드라마 <괴물> 김수진 작가


사건파일- 감정의뢰서, 감정서, 진술 조사서, 수사보고서, 통화내역서 등 공문서

사건 파일은 실제 공공기관에서 사용하는 문서 형식 그대로 작성되어있었다. 사건 구성을 정리해 제작진에게 공유하면 소품 담당 스텝이 만들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수진 작가는 경찰서 문서 형식 사건 감정의뢰서, 현장조사 감정서,  DNA 분석 결과를 별첨 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서, 진술 조사서, 수사보고서, 미제펀철보고서, 부검감정서를 직접 만들었다.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훔쳐보고 온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모든 디테일을 챙겼다. 통화내역서 서류에는 통화일자, 상대방 전화번호, 총 사용요금 등이 표시되어있고 심지어 드라마에 나오지 않은 진술 당시 대화 내용이 진술서에 처음부터 끝까지 적혀 있었다.


ⓒ 드라마 <괴물> 김수진 작가


소품- 신문기사, 병원 입퇴원서, 등기부등본 등

동식의 집 거실 벽에 붙어있던 신문기사는 작가가 직접 쓴 것이었다. 각기 다른 신문기사를 기자마다 날짜마다 다르게 기사를 직접 작성했다. 정제가 병원에 입원한 것이 나오면 작가는 본인이 입퇴원확인서를 작성했다. 화면에 스쳐 지나간 기본증명서와 등기부등본도 작가가 직접 작성한 것이었다. 차용증과 서면질의서는 실제 사용되는 서류 양식 그대로 폰트와 크기를 맞춰 작성했다.



드라마 설정 파일- 사건 시간대별 정리 파일, 인물별 동선, 사건 라인  

등장인물의 삶의 주요 사건과 날짜를 정리한 파일, 사망사건 상황을 시간대별로, 회차와 씬 넘버 별로 정리한 엑셀 파일을 보며 스릴러의 견고한 구성 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 인물별 동선과 사건 라인을 날짜와 회차별로 정리한 파일도 상세하고 견고했다. 이렇게 미리 탄탄하게 구성해두면 오류가 발생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인물별로 상대 캐릭터를 부르는 호칭을 정리해두었고 그 옆에 휴대폰 저장 명도 미리 설정해 둔 것이 가장 놀라웠다. 각 인물마다 다른 캐릭터를 휴대폰에 어떻게 저장해두었는지 엑셀로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몇 번이나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김수진 작가는 함께 일하는 제작진의 이해를 돕고 실수를 줄이기 위해 인물별로 인적사항을 정리한 파일, 장소를 정리한 파일을 미리 만들어 두었다. 글을 쓰다 보면 자신도 헷갈리고 깜빡할 때가 있는데 자기 자신의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으려는 프로의식이 전해졌다.



책을 읽으며 경악하고 반성하고 경탄하고 배우고 메모했다. 이 놀라움을 이 포스팅을 읽는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책을 사진 찍어 보여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토록 헌신하며 세밀하게 조각한 세계를 내가 너무 쉽게 온라인에 공유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출판사가 홍보 목적으로 온라인 서점에 공개한 사진을 캡처해 첨부했다. 드라마 <괴물>을 재미있게 봤거나 작가 지망생 분들은 꼭 직접 찾아 읽으셨으면 좋겠다.


이 책을 보며 깨달았다. 드라마 <괴물>은 실제 하는 세계를 조각조각 비춘 것일 뿐이다. 분명 실제 하는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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