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책 취향이 궁금합니다 -기대 배반 한국단편소설편

2022.02.10

by 오름차차

당신의 취향이 궁금합니다


요즘 어떤 책을 읽고 있냐는 질문과 책을 추천해 달라는 질문, 인생 최고의 책이나 소설을 추천해달라는 것은 모두 다른 것이다. 가장 편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첫 질문이다. 뒤로 갈수록 답변이 어려워진다.


상대방의 필요와 취향을 가늠해 답을 해야 하는 것이라면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추천해줄 수 있다. 결국 내가 읽은 책 리스트와 취향이 반영되고 드러날 수 밖이 없지만 노골적으로 내 취향을 직접 묻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취향 뒤로 내 것을 숨길 수 있다.

하지만 생애 최고의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나도 모르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게 된다. 내 선곡 리스트를 들킨 기분이 되곤 해 몇 번이고 입을 떼려다 말게 된다.



몇 년 전, 내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동생이 자신의 여자 친구에게 사진으로 찍어 보낸 적이 있다. 그녀는 지인의 지인을 묻다 보면 반드시 어딘가에 나와 공통의 지인을 찾을 수 있을 내 또래였다. 책을 좋아했던 그녀는 순수하게 내가 읽는 책을 궁금해했고 내 동생은 아무 생각 없이 내 책상과 방에 놓여있던 책을 모으고 차곡차곡 쌓아 사진을 찍어 보냈다. 느릿하게 흘러가는 그 장면을 보며 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심했다. 그녀에게 내 취향은 저 책이 전부가 아니라고 동생 대신 카톡을 보내고 싶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길티 플래져(guilty pleasure) 책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은가! 뭔가 대단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도서관에서 빌린 5권으로 내 취향인 양 드러내야 하는 것이 불편했다.



지금의 내가 읽는 책을 추천합니다


"책 쪼개서 읽고 있다며. 자기계발서나 인문교양도서 말고 문학에서 추천해줘. 한국문학이면 더 좋고."

이렇게 지난하게 책 취향과 이에 대한 질문에 대해 길게 활자를 늘어놓은 것은 지인이 생존기록을 읽고 책을 추천해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 질문을 받고 한참 고민했다. 내 취향에 대한 질문인가. 아니다. 요즘 쪼개 읽고 있는 책에 대한 궁금증이 담겨있는 질문이다. 자의식 과잉과 취향에 대한 자기 검열을 지우고 그저 한 달 내 읽었던 책 중에 추천해야겠다.



요즘, 매일 한국소설을 읽고 있습니다


가장 많이 소비하는 것을 생산할 수 있다 요즘 스스로에게 가장 자주 읊조리는 문장이다. 그래서 매일 한국문학을 읽고 있는데, 재미있어서 하루 종일 소설만 읽고 싶은 것을 참으며 책장을 덮는다. 단편소설은 한 작가의 작품집 보다 여러 작가의 글이 모여있는 수상집을 위주로 읽었다. 지난 10년 동안의 젊은 작가상 수상집 완독을 계획했는데 요즘 안전가옥 엔솔로지에 빠져 그 작품집들을 먼저 읽을 것 같다.


한국 단편소설 하면 떠오르는 정서와 문체가 있는데, 그것을 기분 좋게 배반한 작품들 위주로 추천하였다. 안전가옥의 엔솔로지 속 단편들도 추천한다. 장르적 쾌감이 느껴지는, 보통의 단편소설 당선작 모음집과 결이 다른 단편이 모여있어 작품집 전체를 추천했다.



요즘의 단편,


박상영,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 2019 젊은 작가상 수상집

친구의 질문을 듣자마자 떠오른 단편 중 하나. 내 또래라면, 약간 멀게 느껴질 수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사회대를 나온 우리로서는 반드시 떠오를 몇몇의 실존 인물이 있어 친구에게 추천했다. 박상영 작가의 유머감각 덕분에 카페에서 책을 읽다 어깨를 들썩이고 엎드려 한참 동안 소리 없는 아우성에 시달려야 했다. 읽는 내내 내 진실의 미간은 평평해지지 않았다. 마스크를 쓴 채 소리 내지 못하고 웃고 야유하느라 힘에 부쳤다.


안전가옥 엔솔로지 <냉면>

김유리, A, B, C, A, A, A

2001년 옥탑방 고양이를 쓴 김유리 작가의 소설. 읽으면서 묘하게 희망을 품게 된다. 텍스트 노동자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위해 추천. 텍스트 소비자들에게도 추천.


범유진, 혼종의 중화냉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흘러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책장을 넘겼다.


dcdc, 남극낭만담

읽으면서 실제로 몸이 서늘해져 뜨거운 물을 마시며 읽었다. 유쾌한 활극이자 로맨스이자 탐험극.

냉면을 주제로, 소재로 이런 글이 나오는구나.



한국 단편 소설 하면 떠오르는 그 기대를 충실히 만족시키면서 마음을 서늘하게 하고 저릿하게 하는 단편들은 다음에 추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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