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낳았다

보르게세에서 읽는 시 8

by 강윤미
책을 낳았다.jpg 그림 JAB KIM





책을 낳았다




강윤미




책을 낳았다 열 달 동안 가슴에 품고 다니던 책이었다 나는 책에게 젖을 물렸다 씻겼다 맞는 옷이 없어서 새 교과서를 받은 날처럼 달력을 입혔다 매일 책을 들여다보았다 해석할 수 없는 울음 근처에선 스탠드를 오래 켜두었다 언어를 배우지 못한 책이 내 등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문자 이전의 문장을 읽지 못해 허둥지둥 목차부터 찾았다 백일이 다 될 즈음 울음은 가끔 웃음과 만나 강을 이루기도 했다 더는 무릎 위에 올라오지 않았다 책이 책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심부름도 잘했다 문방구에서 한참 돌아오지 않은 날도 있었다 내 얼굴에는 밑줄을 그을 만한 구절이 많은지 책이 나를 들여다보았다 내 머리에 먼지가 쌓이기 시작할 때였다 책은 함께 살 책을 데리고 왔다 나를 다 읽혀버린 것 같은 저녁, 책장을 덮기에는 단풍잎이 마음에 걸렸다 나에게도 읽지 못한 청춘이 있는 것 같았다 책은 생각난 듯 나를 책꽂이에 꽂아두었다 내가 낳은 책이 책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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