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다음엔 무엇 17
아이 엄마가 되고부터 ‘공간’에 대한 생각을 부쩍 많이 하게 된다.
아이들이 잠드는 늦은 밤까지 온종일 아이들과 같은 공간에 있다. 방과 거실, 화장실과 주방. 아이 물건이 없는 곳이 없고 물건마다 아이에 대한 생각과 관심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다. 오랜 ‘타향’살이(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꽤 오래 이곳에서 살고 있지만 아직 ‘타향’이라니!)중인 내가 애정을 쏟아부어야 할 대상이 아이들이었다. 유독 아이들에 대한 집중을 놓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나에게 시 쓰는 일은 존재를 확인받는 행위이고 위로의 원천이다. 그런데, 나는 시를 아무 때나 쓰지 못한다. 그런데, 나는 ‘아이 엄마’임을 잊고 세상에 혼자 있는 느낌이 들어야 시를 쓸 수 있다. 참, 골치 아프다.
육아하며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음악을 했던 여성들에 관한 책을 자주 들춰본다. 그들은 아이를 먹이고 재우며 어떻게 예술작업을 할 수 있었을까,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하는지 궁금했다. 주방에서 요리하다가도 글 쓸 뼈대를 메모해 둔다는 작가도 있고, 아이들이 잠든 새벽이나 이른 아침에 작업한다는 그녀도 있다. 아이들을 누군가 혹은 기관에 오래 맡기고 작업실로 간다는 화가도 있다.
내 아이들은 잠깐이라도 내가 아니면 돌봐줄 사람이 없고, 나 자신조차 문밖에 세워두고 들어오지 못하게 할 공간이 없다는 것이 늘 쓸쓸하게 했다. 아직 새 주인을 만나지 못한 빈 아파트에 가서 글을 쓰는 상상, 작은 책상을 아파트 비상계단에 놓고 아이들이 잠들면 그곳에 몰래 가서 글 쓰는 상상을 한다. 화장실의 구멍들을 다 틀어막아 물 대신 시가 흘러나오는 방으로 만드는 상상도 자주 한다.
시를 쓰지 않고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자면 재미있는 영화 한 편 보다 잠드는 일상이면 충분하다고 마음 다독인 적도 많다. 시를 잃으면 시를 대신할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데, 배운 재주는 없고 타고난 특별함도 없는 내가 시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시는 한번 손에 쥔 이상 쉽게 버리지 못하는 지문이다.
어느 날 섬에 있는 동생이 내가 고향의 시장 한복판에 방을 얻어 혼자 있는 꿈을 꿨다고 연락 왔다. 창문이 없는 어두운 방이었다고 했다. 내가 꾸지 않았지만 내가 꾼 꿈 같고,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그럼직해서 한참 생각에 잠겼다.
고향 집은 어른이 되기 전의 나만 있어서 낯설다. 나는 이미 그곳에서 멀리 왔다. 자주 들르지 못하는 고향 집은 나의 일부를 나의 전부라고 우기는 것들로 채워 놓은 박물관이다. 깨트리지 않은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달걀을 오래 쥘 수 없다.
여러 번의 이사를 거치며 만났던 작은 방과 더 작았던 방. 그곳에 노란 전구를 켜고 내가 내쉬는 숨소리를 들으며 시를 썼던 나는 어디로 갔을까. 어디로 사라져버려서 이렇게 오래 연락이 되지 않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