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토와 알프레도

당신 다음엔 무엇 28

by 강윤미
토토와 알프레도.jpg 그림 metaphor





아이가 잘 성장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계절에 맞는 옷과 매일 배부르게 해줄 음식? 나이에 맞는 장난감과 놀이터? 맞다. 모두 아이들에게 있어야 할 것들이다. 그리고 편지에 붙는 추신 혹은 첨부파일 같은 것이 있다. 바로 주변에 ‘괜찮은’ 어른이 있는 것. 그렇다면 꽤 근사한 성장 과정을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들이 모두 잠든 밤, 그냥 잠들기가 아쉽다. 모두 잠들어 있고 나 혼자 깨어있다는 느낌은 집안에 혼자 있는 느낌과 얼추 비슷하다. 텅 빈 집에 혼자 있을 기회가 적은 내게 모두 잠든 밤은 그냥 보내기 어려운 시간이다. 컴퓨터로 영화를 보곤 하는데, 오늘의 선택은 <시네마천국>. 물론 내용은 다 알고 있다. 무엇보다 음악은 익숙하다 못해 낯설기까지 하다. 오늘의 이 영화를 다시 꺼내든 것은 청소를 하다 책장 맨 밑에서 오래전, 대학 후배가 공 CD에 복사해서 준 영화 파일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발견했기 때문에 다시 봐야 했다. 먼지를 뒤집어쓴 영화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영화나 극장에 관한 경험을 할 수 없었던 환경에서 자란 나는 어른이 돼서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 영화를 본격적으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제목이나 포스터를 보고 골라 보거나 너무 유명해서 이름이 익숙한 영화들을 우선 봤다. 영화를 보고 나서 마음에 든 영화가 있으면 그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의 다른 영화들을 찾아보거나 그 감독이 만든 다른 영화를 찾아서 보는 식이었다. 영화광들이 손꼽는 세계적인 영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100편의 영화 같은 타이틀 속에 묶인 영화들을 찾아보곤 했다. 몇 가지 내가 싫어하는 요소들이 있는 영화들을 제외하곤 무작정 많은 영화를 찾아서 보려고 했던 시절이었다. <시네마천국> 역시 그때 만난 영화였다.


자취방의 새벽은 나 홀로 빛나서 외로울 틈 없었다고 믿고 싶었는데, 그런 영화들을 만나 실컷 울고 나면 뭔가 가슴속에서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다. 젖어 있는 내 감성이 참 좋아 새벽에 쉽게 잠들지 못했었다. 필름들이 불에 타기 시작하면서 순식간에 극장은 불에 휩싸이기 시작하고 광장에 있던 어린 토토가 쓰러져 있는 알프레도를 끌고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 작은 몸의 토토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알프레도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필사적으로 계단으로 끌고 내려오는 그 장면. 그리고 그때의 사고로 시력을 잃은 알프레도가 “너에겐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어.” 하며 어린 토토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자 청년 토토의 얼굴로 바뀌는 울컥한 장면.


그때 자취방에 있던 나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저 아름답다 여겼을까. 두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고 있는 내게 오늘 밤, 이 장면은 그저 아름답게만 여겨지지 않는다.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냥 ‘아름답다’라는 말로만 끝낼 수 없는 일이다. 누구나 어른이 되지만, 주변에 누가 있었느냐에 따라 어른이 되는 과정의 밀도와 질감은 다르다. 그저 나 혼자 생각하고 나 혼자 행동해도 될 때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 두 아이의 삶에 내가 하는 행동과 말이 영향을 주리라는 것을 알고 지내는 일은 다르다.

로마로 떠나는 기차역에서 알프레도는 토토에게 향수에 젖지 말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말라는 마지막 당부를 한다. 그리고 “너랑 이야기하기도 싫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너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라고 말하며 토토를 꽉 안아준다. 토토는 그때 알프레도의 만남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몰랐겠지만, 알프레도는 알았을 것이다. 기차를 타고 떠난 토토를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향수와 사랑을 두고 먼 곳으로 가서 다른 일에 몰입해야 하는 일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토토가 30년 동안이나 고향에 돌아오지 않고 로마에서 유명한 감독이 되었다는 것. 그러나 30년이 지나 돌아온 고향에서 첫사랑의 기억에 사로잡힌 자신이 이제껏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진실을 깨닫는 것. 성공한 감독이 되는 일과 사랑의 결실을 맺는 일. 어느 쪽이 더 행복한 삶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키스 장면들만 모아놓은 필름들을 돌려보며 인생을 돌아보는 중년의 토토는 쓸쓸해 보여 조금 안도가 된다. 무엇을 이룬 사람이나 이루지 못한 것을 품에 안은 사람이나 쓸쓸하다. 그래서 우리는 극장에서 만난다.


키스는 열렬한 감정의 표현이고 절정의 순간이다. 누군가를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을 때는 생각보다 짧고 꿈에 매진할 수 있는 마음의 열정을 오래 끌고 가는 것도 힘든 일이다. 끊임없이 마음에 걸림돌이 생기고 밥벌이를 우선 해결해야 하는 고단함이 뒤따른다. 사랑과 꿈을 믿었던 마음의 귀퉁이가 곧 너덜너덜해진다. ‘꿈’은 어쩌면 잘 때만 가능하기 때문에 ‘꿈’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힘이 없다. 어떤 어른을 만나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생각과 경험과 정서의 뿌리는 다르게 뻗어 나간다. 뿌리와 잎들이 어디까지 뻗어 나갈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부모들은 아이들을 과소 혹은 과대평가하기 쉽다. 잔소리가 자꾸 힘이 세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양육과 책임에서 벗어난, 아이에게 자유로움과 상상의 힘을 키워줄 수 있는 ‘괜찮은’ 어른이 아이 옆에 있다면 아이는 자신에게만 있는 본질적인 힘을 쉽게 잃지 않을 것이다.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듣는 사람 상관없는 이상한 흥얼거림을 하고 배워본 적 없는 춤을 추고 그때의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 되는 일. 아이가 사랑하는 창의적인 행동과 말. 우리는 모두 누구나 예술가였지만 어느새 특별한 사람, 특별해지고 싶은 사람만 예술을 한다고 믿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영화를 사랑하는 토토는 극장에서 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감독이 되어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알프레도는 알고 있었다. 토토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편지 밑에 붙는 추신과 첨부파일. 우리가 하고 싶은 말들은 모두 거기에 있다. 편지가 할 일은 그것들을 당신에게 잘 전달하는 일.


추신: 이 글을 몇 달 전에 써놓고 다시 들여다보던 요즘, 엔니오 모리꼬네가 영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큰아이를 임신했을 때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가서 엔니오 모리꼬네 콘서트를 봤다. 기차 시간 때문에 인터미션 때 나와야 했다. 언젠가 이탈리아에 가면 그의 음악을 듣겠노라 다짐한 적이 있다. 이제 우리 집 라디오에서 그의 음악을 틀 차례이다. 음악이라는 것을 남겨준 그의 영혼에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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