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

당신 다음엔 무엇 27

by 강윤미
빨강머리앤.jpg 그림 metaphor






빨강머리 앤에 대한 향수를 가지지 않은 여자아이가 있을까? 나 역시 빨강머리 앤을 보고 자랐다. 책을 찾아 온라인 서점을 기웃거리다가 빨강머리 앤 dvd를 우연히 보게 됐다. 순식간에 10장의 dvd 세트를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를 했다.


그때는 아이들이 많이 어렸다. 뾰족한 모서리에 찍히면 얼굴에 상처가 나고 가위질을 할 때는 왼손이 다치지 않게 조심해야 하며, 뜨거운 냄비를 만지면 안 된다는 것을 부지런히 알려줘야 했던 때였다. 빨강머리 앤의 희로애락은 아직 먼 이야기였다.


집에 도착한 dvd를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책장 맨 위에 올려놓았다. 손상되지 않은 여운이 집 안 어딘가에서 풍겨왔다. 아이들이 어려 dvd를 꺼내 볼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앤의 웃음이 우리 집에 도착했다는 것만으로 좋았다. 이제 언제든 동그란 dvd를 꺼내기만 하면 현실이 될 테니까.


큰아이가 아홉 살 때 처음으로 둘이서 당일치기 서울 여행을 했다.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서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디자인 전시회와 명화 전시회를 봤다. 오후 늦게 기차역에 도착하니 역과 연결된 백화점 전시회장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빨강머리 앤, 플란다스의 개, 톰 소여의 모험……. 내가 어릴 때 보고 자란 TV 만화. 만화 캐릭터를 배경으로 아이의 사진을 찍고 애니메이션 장면이 담긴 두꺼운 책도 샀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두꺼운 책에 있는 그림들을 관심 있게 넘겨 봤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그림들. 그 그림들이 모여 움직이는 영상이 된다는 사실에 신기해했다. 인물의 표정과 감정을 다양한 각도에서 그린 그림들. 아이는 장면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종이에 따라 그려보곤 했다. 나는 책장 맨 위에서 빨강머리 앤 dvd를 꺼내서 아이에게 보여주었다. 아이도 나도 이제 앤을 만날 때가 온 것 같았다. 큰 가방을 든 앤이 기차역에서 매튜를 기다리는 장면, 조용한 매튜 옆에서 수다를 떨다가 마차가 지나가는 사과나무 터널 길을 ‘기쁨의 하얀 길’이라고 이름 붙이는 장면. 아이 옆에서 빨래를 개면서 나도 슬쩍 봤다. 참, 오랜만이다. 앤.


시를 쓰는 내가 앤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앤이야말로 시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것이든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붙이고 사소한 것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으니 말이다. 사물과 사건을 자기 품에 안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니 어쩌면 보통 사람보다 더 아프고 더 속상하고 더 억울할 수 있겠다. 앤이 시인이 되지 않고 선생님이 된 것은 앤다움을 잊지 않으려던 것일 것이다. 혼자 남은 마릴라 아주머니를 돌보기 위해 멀리 가는 대신 마을로 돌아오는 일을 선택한 앤. 출세와 성공을 위해 고향을 떠나는 것보다 어려운 선택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앤의 섬세함과 애정이 여러 의미를 품은 시어(詩語)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어른으로 성장 시켜 주었던 것이다.

어른이 될 때까지 길버트와 화해하지 않는 고집불통을 갖고 있고 창문 밖으로 불빛을 깜빡이며 다이애나와 소통하는 앤. 수다가 지나쳐 때론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어른으로선 이해되지 못할 행동으로 마릴라 아주머니를 화나게 하는 앤.


예민하고 낯도 많이 가리던 큰아이는 한편으로 영민함과 놀라운 집중력을 가진 꼬맹이였다. 꼬맹이가 앤과 친구가 될 수 있을 만큼 자랐다. 어른들에게 혼나면서도 자기다움을 잃지 않은 사고뭉치 앤이 길버트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던 순간. 자기 안의 우겨질 대로 우겨진 감정의 뭉치들을 손바닥을 펼쳐 공중으로 띄어 보내는 용기. 그래서 앤의 성장은 아름답다. 초록색 지붕집을 둘러싼 붉은 노을의 보색대비 때문만은 아니다.


초록색 지붕집의 튀어 나온 창문에 손바닥을 턱에 걸치고 밖을 응시하는 앤의 눈빛. 무엇이든 그 눈빛으로 걸어 들어가면 나오는 길을 잃어버려 그대로 앤이 다 가져버릴 것 같다. 그래서 빨강머리 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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