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다음엔 무엇 26
여름은 걷기 좋은 저녁을 선사한다. 땡볕으로 지친 오후를 버텨낸 선물 같은 시간. 아직 환한 저녁이 내 곁에 바짝 다가와 있다. 걷지 않을 수 없다.
이 동네로 이사 와서 가장 좋은 점은 천변이 있다는 것. 대학 시절에 타고 다니다 그동안 잊고 있던 자전거도 새로 구입했다. 남편과 나는 각자의 자전거 뒤에 아이를 태울 수 있는 안장을 설치했다. 남편은 큰아이를 태우고 나는 작은 아이를 태우고 천변을 달린다. 큰 아이가 보조 바퀴를 떼기 시작하면서부턴 큰 아이 혼자 자전거를 탄다. 남편 뒤에 작은 아이, 큰아이가 가운데,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달린다.
우리는 서점에 가서 책을 보다 오기도 하고 옆 동네의 단골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돌아오기도 한다. 한옥마을 근처에 자전거를 세워 두고 아주 큰 그네를 타고 단골 액세서리 가게에서 아이들의 머리끈이며 머리띠 같은 것을 산다. 아주 작아서 가방에 쏙 넣을 수 있는 소소한 기쁨. 아이들에게 자전거 여행은 신나는 놀이다.
천변에는 풀 속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내는 풀벌레들이 있고 엄마 오리를 따라다니는 아기 오리 여러 마리가 있다. 물살이 빨라지는 징검다리 곁에서 자리 잡고 서서 물고기를 잡으려고 한참 고심 중인 새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풀숲 여기저기 흐드러지게 핀 나팔꽃과 민들레가 있다. 가을에는 핑크 뮬리가 기다린다.
여름 저녁에는 걷는 사람들이 많다. 남편은 평일엔 늘 늦기 때문에 저녁밥을 먹고 나면 아이들과 나만 걷는다. 물 한 병을 넣은 가방을 각자 들고 여자 세 명이 걷는다. 나는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일은 돌 징검다리를 건너는 일. 물살이 꽤 빠를 때는 빠질까 염려가 돼서 나는 작은 아이 뒤에 바짝 다가간다. 내 염려는 염려일 뿐이고, 아직 물에 빠져보지 않은 아이는 두려움을 모른다.
작은 폭포처럼 위에서 아래로 물이 내려오는 구간이 있는데, 비가 갠 오후에 우연히 갔다가 우렁차게 물이 내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처음 알았다. 내 마음이 불어난 물이 우렁차게 흘러내리는 그 소리를 편안하게 느낀다는 사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에는 마을의 중앙을 관통하는 ‘내창’이 있다. 하천을 우리는 ‘내창’이라고 부른다. 물이 고여 있는 곳도 있지만, 평소에는 물이 말라서 대부분의 곳에서 여러 모양의 바위와 돌멩이들이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폭우가 지나간 뒤엔 사람들이 건너는 길을 덮을 만큼 물의 힘은 위력적이다. 천변의 작은 물줄기 소리에서 어린 시절 목격했던 위력적인 물소리가 생각났다. 내 신발이었을까. 혹은 동네 아이의 신발이었을까. 신발들이 떠내려가던 잔상이 남아있다. 어느 정도 큰 물살이 지나간 뒤엔 동네 사람들이 앉아 빨래하고 바지를 무릎까지 올리고 물살이 닿는 감촉을 느끼려 걸어 다니던 기억이 있다. 아주 어릴 때 일이다.
내 몸이 물살의 기억을 끄집어낼 줄 몰랐다. 나는 아이들과 물이 내려오는 구간에 멈춰서 잠시 물이 아래로 내려가는 소리를 듣는다. 혼자 있었더라면 좀 더 깊게 빠져들 뻔한 상념을 아이들의 수다가 나를 잡아끈다.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저녁의 끝을 붉은색 물감이 칠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붉은색 하늘 곁으로 돋아난 바람의 마음을 듣는다. 집으로 돌아갈 때가 왔다. 우리가 걷는 길 뒤로 밤이 쫓아온다. 천변은 없고 물 냄새가 난다. 천변은 이제 천변의 곁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