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 뱀, 뱀

당신 다음엔 무엇 38

by 강윤미
뱀, 뱀, 뱀.jpg 그림 metaphor





평생 볼 뱀을 어릴 때 다 보고 말았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한라산 중산간 마을에는 풀과 나무가 많았고 물이 있었다. 풀과 나무와 물 곁에서 뱀은 자랐다. 나도 자랐다.


섬의 골목은 구멍이 숭숭 뚫린 검은색 현무암으로 쌓아 올린 돌담이 양옆으로 길을 만든다. 마을에 있던 분교에서 수업을 마치면 걸어서 집으로 간다. 곤란하게도 돌담 맨 끝 집이 우리 집이었다. 돌담길을 꼭 지나쳐야 했던 것이다.


돌담 맨 위에 뱀이 앉아 있다. 돌과 돌 틈에서 뱀이 삐쭉 머리를 내민다. 작은 내 발이 앞을 내딛기 오초 전쯤, 왼쪽 돌담에서 나온 뱀이 황급히 오른쪽 돌담으로 건너간다. 검은색 돌과 검은색 뱀.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작은 발소리를 듣고 얼굴을 내밀던 그 뱀들. 나랑 놀고 싶었던 걸까?


집에 개를 키우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어린 시절. 우리 집을 거쳐 간 개의 족보를 만들 수 있을 만큼 개의 역사는 삼 남매의 성장과 시간을 함께한다. 화장실이 밖에 있던 슬레이트집에 살던 시절, 우리 집 마당엔 개와 더불어 닭이 있었다. 엄마는 화장실 한쪽에 라면 상자를 넣어두었다. 닭은 알을 낳을 때가 되면 상자에 들어갔다. 쭈그리고 앉아 볼일을 보고 있으면 갓 낳은 알의 온기와 닭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풍겨왔다.


어느 날, 집에 동생들과 나만 있었는데, 화장실에 들어간 순간 놀라자빠질 뻔했다. 라면 상자 안에는 뱀이 동그랗게 꽈리를 틀고 있었다. 상자 가득 뱀이었다. 그리고 냉장고 안으로 들어간 차가운 알이 아닌, 실온의 생명이 있는 그것이 뱀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나는 겁에 질려 할머니 집으로 달려갔다. 할머니는 소금 한 줌을 집어 들어 화장실로 가셨다. 물컹물컹하고 능글능글 긴 몸을 늘어뜨리며 상자 밖으로 나오던 그 뱀.


집으로 가는 골목의 입구에 큰 팽나무가 있었다. 팽나무에서 뱀이 떨어지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뱀을 물고 마당을 유유히 지나가는 고양이를 목격하기도 했다.


물뱀도 많이 봤다. 한라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의 길을 품은 ‘내창’이 마을을 관통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물뱀이 자주 출현했다. 딱히 갈 데가 없는 우리들은 학교가 끝나면 마른 하천인 그곳에 자주 갔다. 바위 위에 앉아 놀기도 하고 올챙이알 도롱뇽알 같은 것들을 관찰하기도 했다. 물이 고여 있는 곳도 있었는데 그곳에 사는 뱀을 이따금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뱀이 나타나면 뱀을 잡는 일을 하는 가족의 일원인 그 남자아이를 불러왔다. 아이는 망설임 없이 뱀을 잡았다. 뱀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아이라는 사실이 까만 얼굴에 묘한 긍지를 새겨 넣었다.


습한 섬 특성상 뱀에 대한 설화가 많다. 집으로 들어온 뱀을 잘못 건들면 큰일이 생긴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은 뱀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그냥 지나가게, 왔던 곳에서 갈 곳으로 어서 가기를 우리는 잠자코 기다렸다. 뱀을 잡아 파는 일을 했던 그 가족에게 불행이 닥쳐온 것을 두고 마을 사람들은 뱀의 화가 불러온 결과라고 믿었다.


아이들과 동물원에서 뱀을 볼 때가 있다. 유리벽에 갇힌 뱀은 유리벽에 갇힌 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생김새 자체도 공포스러웠지만 예상할 수 없는 순간에 맞닥뜨려야 해서 익숙해지기 힘들었던 어릴 때의 뱀과 다르다. 동물원에 있는 뱀은 안에 있고 나는 밖에 있기 때문에 두렵지 않다. 다만 징그러울 뿐이다. 유리벽 안에 있는 뱀은 아무것도 하기 싫어 경청하듯 내 얼굴을 바라본다.


귀신처럼 아무 때나 출몰하던 뱀들. 귀신은 본 적 없지만 뱀은 많이 봤다. 마을을 벗어난 내가 그곳을 떠올리면 뱀은 몸에 난 무늬를 길게 늘어뜨리며 내 기억에 점을 찍는다. 집 나간 자식처럼 나는 마을을 벗어나서 마을과 전혀 다른 풍경의 장소에서 살고 있다. 뱀이 지나간 길에 어린 내가 흩뿌린 두려움과 불안이 아직 마음에 남아 있다. 뱀은 차분히 기다리면 지나갔고 두려움과 불안도 곧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어른이 된 후 생겨난 두려움과 불안의 원인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들은 자주 바뀌었고 정확하지 않았다.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불완전한 어른의 모습으로 살아갈 뿐.


무서워서 그립고 만질 수 없어서 간절하고, 독이 있어서 황홀한 유년의 뱀. 꽈리를 틀고 알을 몸 한가운데로 밀어 넣던 광경마저 그리워지는 날엔 마당 구석 푸른 영토를 차지하고 있던 호박잎 넝쿨과 젊어서 예민했던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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