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다음엔 무엇 39
여행을 갈 때마다 어린 왕자를 데리고 왔다.
도시의 상징물이 새겨져 있는 냉장고 자석, 머그컵, 열쇠고리 같은 것 대신 나는 어린 왕자를 선택했다. 어느 곳이나 있을 것 같아서 구하기 쉽고 모아두는 것만으로 여행의 기록이 될 것 같았으며, 같은 내용의 책이 어떤 글자와 디자인과 크기로 도시와 만나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스물일곱이었던 나는 스물넷이었던 동생과 어떤 이야기를 오고 가던 중에 해외 여행을 가보자는 결론에 이르렀고 가깝고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갈 수 있는 일본을 선택했다. 일본 중에서도 부산에서 배로 갈 수 있다는 후쿠오카가 우리가 선택한 첫 해외 여행지였다.
우리는 통장에 있던 몇 십여만 원의 돈으로 제주에서 부산으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하고 부산에서 떠나는 후쿠오카 행 배편을 예약했다. 저녁 비행기로 김해 공항에 도착해서 부산의 찜질방에서 자고 아침 일찍 배를 탔다. 배에서 내려 한국이 아닌 곳의 공기를 처음 만나고 낯선 상자 같은 그곳에서 이질적인 언어들을 들었다. 낯선 곳으로 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날 늦은 밤까지 우리는 참 오래, 참 길게 걸었다. 다음 날 아침, 체크아웃 해달라는 호텔 직원의 다급한 전화벨 소리를 들어야 깰 수 있었을 만큼 고단했지만 꿈 한번 꾸지 않고 정말 푹 잤다.
그 짧은 1박 2일의 여행에서 무심코 ‘어린 왕자’를 떠올렸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여행의 연대기가 되었다. 일단, 여행을 떠나기 전에 여행지의 언어로 출판된 어린 왕자를 검색해서 책 사진을 휴대폰에 저장해둔다. 영어를 쓰는 나라는 영어로 책 이름을 말하면 되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는 휴대폰에 찍어 둔 사진을 보여주는 것이 책을 찾을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좁고 작은 집과 차가 인상적이었던 일본에서 만난 어린 왕자는 역시 손바닥 하나에 들어오는 작은 책이었다. 세로로 글자가 적힌 것도 독특하다. 고집스럽다.
신혼여행으로 처음 멀리 갔던 프랑스 소로본 대학 근처에서 산 어린 왕자는 귀여운 폰트의 글씨체가 앙증맞다. 오르세 미술관에 있던 기념품 가게에서 명화 엽서와 명화 수첩 사이에서 뜻밖에 어린 왕자를 발견하기도 했다. 책장을 펼치면 노란 뱀을 만난 어린 왕자가, 높은 산에 올라간 어린 왕자가 튀어나오는 팝업북이다. 이탈리아의 피렌체 두오모 성당 근처에서 샀던 어린 왕자의 글씨체는 푸실리 파스타처럼 꼬불꼬불 귀엽다. 신혼여행으로 갔을 때, 세 살 아이와 다시 피렌체에 갔을 때 모두 어린 왕자를 만났다.
동생과 갔던 프라하의 바츨라프 광장에서 체코어를 입은 어린 왕자를 만났다. 낯선 체코어로 적힌 어린 왕자는 인쇄된 체코어가 처음부터 끝까지 생경한 느낌을 주어서 문이 꽉 닫힌 성문처럼 느껴지지만, 주정뱅이 아저씨나 세 개의 뿌리가 맞닿아 있는 바오밥나무는 그대로여서 아늑하다. 빈의 슈테판 대성당 근처에서 산 어린 왕자는 작은 글씨로 정갈하게 적혀 있고 아주 가볍다. 비엔나소시지를 먹으며 읽기 좋다.
엄마와 갔던 벨기에의 브뤼헤라는 아름다운 도시에서도 어린왕자를 잊지 않았다. 마르크트 광장에서 작은 집에 사는 어린 왕자를 만났다. 그림은 최소한의 영역에만 그려져 있고 글이 우선인 작고 소박한 책. 서점 주소와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가 적힌 책갈피가 아직 책 속에 꽂혀 있다. 계산한 영수증에는 독서의 즐거움을 뜻하는 네덜란드어가 적혀 있다. 그 주소로 편지를 보내면 독서의 즐거움을 알게 해 줄 책 한 권, 추천해줄까?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다 들어간 서점에도 어린 왕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나에게 양장 제본을 한 어린 왕자는 다음엔 반 고흐 미술관에 들렀다 가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엄마와 갔던 여행이어서 패키지여행으로 선택했는데, 사람들을 따라다니느라 가보지 못한 곳이 많았다. 풍차는 보고 고흐는 못 봤던 것이다.
어린 왕자를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아는 동생이 런던의 노팅힐 서점에서 어린 왕자를 사다 주었다. 그림마다 선명한 색상이 입혀져 있고 글씨에는 금빛이 반짝인다. 표지를 왼쪽으로 펼치면 유럽의 미술관 벽을 연상하게 하는 꽃무늬가 그려져 있다. 다른 언어들에 비해 가장 익숙한 영어로 적혀 있어 아무런 감흥이 없을 뻔했는데, 새파란 하늘에 금빛 모래알을 뿌려 놓은 듯한 책의 디자인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은 책 한 권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다 가졌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분명 책을 디자인한 사람이 여자일 것 같다는,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을 해 본다.
우리 집에 온 많은 어린 왕자 중에서도 맨 처음 내 손에 도착한 손님은 네팔에서 온 이국적인 어린 왕자다. 유럽이나 일본의 책에 비해 표지 색상도 선명하지 않고 촌스럽다. 스카프가 어린 왕자를 의미하는 네팔어 가까이에서 멈춘다. 바람에 나부끼는 분홍색 스카프와 분홍색 머리카락의 어린 왕자. 옷까지 분홍색을 입었으니 말 다 했다. 학교에서 한국어 교육 봉사를 하러 갔던 애인은 전화 교환원인 네팔 아이에게 동전을 주고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자취방에 있던 내가 아주 길고 아득한 번호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정답게 반가워했다. ‘정답게 반가워했다’라는 말은 어색하지만, 생각난 대로 쓰기로 한다. 생각난 대로 써야 그때의 감정이 여기 적힐 것 같다. ‘네팔에서 온 편지’라고 이름 붙이고 번호를 휴대폰에 저장해 두었다. 그 번호로 전화하면 교환원이었던 아이를 거쳐 애인이 전화를 받을까?
네팔 아이는 이제 어른이 됐을 테고, 애인은 자라 남편이 됐다. 그리고 애인이 데리고 온 첫 어린 왕자를 나는 배신하지 않았다. 그에게 『어린 왕자』를 읽는 두 딸아이를 선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