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은 서럽다

당신 다음엔 무엇 37

by 강윤미
서랍은 서럽다.jpg 그림 metaphor





서랍은 열고 싶고 열면 꺼내고 싶다. 서랍은 뭐든 넣기 좋고 뭐든 숨기기 좋다. 모두 닫힌 서랍장은 새침한 애인 같다.


약을 넣으면 약 서랍, 양말을 넣으면 양말 서랍, 그릇을 넣으면 그릇 서랍, 일기장과 통장을 넣으면 비밀 서랍, 아무것도 넣지 않으면 그냥 서랍. 서랍은 물건들의 집이다. 고향이다.


시간을 먹고 사는 서랍은 시간에 비례해서 점점 더 많은 물건을 소유하게 된다. 뚱뚱해진다. 신기하다. 서랍은 그 많은 물건을 집어 먹고도 몸매를 유지하니까. 닫아 놓으면 살이 쪘는지 모르겠다. 정말 그렇다. 닫힌 서랍은 누군가의 문 앞에서 노크해야 하듯 쉽게 열지 말라는 무언의 약속을 품고 있다. 누군가 확 열어버렸을 때 서랍 속 물건들은 샤워를 막 끝내고 큰 수건 하나로 몸 가운데만 가린 상태일 수 있다!

마음이 뒤숭숭한 날 서랍을 통째로 꺼내 물건의 정체를 확인한다. 서랍 속에는 언제 들어갔는지 모를 물건들이 가득하다. 분명 내가 넣은 물건인데 낯설어서 당황스럽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을 수 없을 때 집안의 모든 서랍을 연다. 잃어버린 물건이 꼭 그 속에 있을 것만 같아 한번 열었던 서랍을 닫았다가 다시 열어 뒤진다. 있어야 한다고, 분명 있다고 믿고 있던 물건이 없다. 서랍을 꽝 닫았다 다시 열고 물건을 끄집어낸다. 어, 이상하네? 분명 여기 있었는데. 여기 있어야 하는데, 라며 착각한다. 물건은 모른 척 대답한다. 아니, 나 여기 없거든!


그리하여, 서랍은 서럽다.


서랍은 처음부터 끝까지 몸을 몇 군데로 분리하여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당신에게 몸을 내줬을 뿐이다. 서랍 속에서 옛 애인의 편지나 쌍꺼풀 수술하기 전의 유년기 사진이라도 나오면 서랍은 괜한 죄책감과 상념에 빠지게 만드는 장본인이 된다. 소화되지 못한 위장처럼 많은 물건을 빽빽하게 집어넣은 서랍은 한번 들어가면 주인의 손길 한번 느껴보지 못한 채 꼼짝 않고 있어야 하는 물건의 무덤이다.


잃어버린 물건들이 어딘가로 가서 ‘잃어버린 물건들의 도시’를 만들고 있다는 상상을 한다. 내가 잃어버린 물건을 그리워하는 시간을 에너지 삼아 그들은 그들의 왕국을 더욱 튼실하게 짓는다.

잃어버린 것들의 도시에는 물건만 있지 않다. 내가 듣던 음악과 좋아하던 영화, 한때 매일 부르던 친구의 이름이 있다. 서랍 속에서 오래전 듣던 휴대용 시디플레이어가 빼꼼 인사한다. 대학 빈 강의실에 앉아 시디플레이어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던 나의 마음. 컵 맨 밑바닥에 가라앉은 침전물처럼 차분히 속삭이는 영혼을 달래려 애쓰던 나의 손길. 친구에게 받은 편지들. 내가 보낸 편지들은 친구의 서랍 속에 아직 있을까. 편지 속에 갇힌 언어들. 봉투 안에 넣고 묶어버린 나의 감성. 미술관에 갈 때마다 사 두었던 그림엽서. 그림에 빠져 명화 책을 참 열심히 보던 때가 있었다.


되돌아보면 자취방에 있던 나는 누구도 오지 못하게 한 채 스스로를 가두고, 가둔 상태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자취방도 서랍 같은 거였다. 나는 열쇠를 열어 서랍 안으로 들어가 옆으로 누워 있기도 하고 엎드리기도 했다. 누가 나를 그려주었다면, 누가 나를 찍어주었다면 나는 슬픔을 잊은 채 모델이 됐을 것이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에 나오는 누드모델처럼 나는 눈동자가 없는 차가운 시간을 통과해야 했다.


불면의 밤마다 그림과 영화와 음악과 시에 기댔다. 내가 사랑하던 것들이 나를 돌봐주어서 나는 그 시절을 무사히 지날 수 있었다. 작가가 되니 참 좋구나. ‘내가 사랑하던 것들이 나를 돌봐주어서 나는 그 시절을 무사히 지날 수 있었다.’라고 어여쁜 언어들로 시절을 장식할 수 있으니까.


기린의 무늬가 서랍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린 서랍>이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목까지 네모 서랍을 가득 달고 사는 기린의 삶. 서랍 하나를 열면 서서 잠들어야 하는 기린의 불안이 또 다른 서랍을 열면 저만치 목이 길어져 버린 기린의 고독이 열린다. 잘못 연 서랍에서 아프리카의 바람 소리가 흘러나온다. 내 서랍까지 바람 소리가 이사 온다.


서랍 속 많은 물건에 의지해서 하루를 보내고 서랍에 물건을 채워 넣으며 삶은 지속된다. 닫히지 않는 서랍엔 모양이 잡히지 않은 하루를 담기 좋다.

오묘한 색을 가졌으며 올망졸망한 형태를 유지한 서랍을 보면 집에 데리고 오고 싶어 눈이 번뜩인다. 집에 새 서랍이 오면 물건들은 알아서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 이불을 펴고 눕는다. 언제 서랍 밖 외출을 하게 될까, 싶어 천천히 게을러진다.

있는 그대로 만족하며 살기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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