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다음엔 무엇 36
겨울이 되면 우리는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11월이 되면 신문사별로 나오는 마감 일정을 달력에 표시한다. 원고 마감일이 ‘소인 유효’인지 ‘도착’까지인지 신문사마다 다르기 때문에 원고를 보내야 하는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달력에 표시해 두는 것이다. 신문사마다 4∼5편 정도의 시를 보내야 하므로 서울에 있는 신문사, 혹은 지방에 있는 신문사까지 다 보내려면 몇십 편의 시가 있어야 한다. 중복 투고를 하면 당선이 되더라도 취소가 되기 때문에 평소에 시를 많이 써두는 것이 중요하다.
시를 평소에 많이 써둬야 한다는 말은 평소에 공부습관을 가져야 한다는 말처럼 어려운 일이므로,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고 낙엽이 쌓이기 시작하는 11월이 되어야 발에 불이 떨어진다. 이미 써둔 시들은 낙선했던 기록을 딱지처럼 붙여 놓았으므로 늘 새로운 시가 필요했다. 세상을 뒤흔들만한 시, 그래서 나조차 세상에 내던져졌다는 체감을 못 하는, 나의 삶과 닮아 있지만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 세상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를 갈급했다. 달력에 비장한 마음으로 빨간 동그라미를 그려 놓으면서 우린 신춘문예의 계절이 시작되었음을 실감한다.
시를 썼다고 다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므로 써둔 시 중에서 내가 보내고 싶은 시들을 선별한다. 꼭 보내고 싶은 신문사를 선정하고 신문사마다 보낼 시들을 4∼5편 정도 추리는 것이다. 시라는 것은 정답이 있는 토익이나 공무원 시험이 아니므로 순전히 자신의 ‘감’을 믿는 수밖에 없다. 어떤 시가 내 품을 떠나 ‘등단’이라는 소식을 전해줄 비둘기가 되어 돌아올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보통 12월 초부터 중순까지 신문사의 마감이 이루어지므로 12월의 반은 시를 새로 쓰고 마지막으로 퇴고하고 갈색 봉투에 신문사 주소를 적어 우체국에 가는 일로,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하다.
12월의 반을 그렇게 보내고 나머지 반은 전화기를 수시로 보는 일에 온정신을 쏟는다. 시, 소설, 평론, 아동문학 등 각 부문의 한 사람에게만 울리는 기자의 전화. 크리스마스가 될 때까지 전화를 받지 못했다면 거의 울기 직전까지 간다. 당선되지 않았음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1월 1일 자 신문에 당선 시와 당선 소감을 실어야 하므로 당선자에게 소감을 받기 위해 기자가 미리 당선 통보를 하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우리는 우울한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헛헛한 웃음을 흘려보내야 했다. 그렇게 12월 31일 저녁이 되면 슬슬 신문마다 당선 시와 당선 소감, 심사평이 실리기 시작한다. 신문사들은 응모자가 1,000명에 육박했다거나 5,000편이 넘은 작품이 응모되었다는 ‘수량’을 앞세워 주눅 들게 했다. 그 정도면 로또에 당첨될 확률과 비슷하지 않나, 하는 자괴감이 섞인 말들을 우리는 쏟아내곤 했다.
심사평에서 본선에 오른 작품 몇 편이나 최종심에 오른 응모자의 이름이 언급되곤 하는데, 그중에 자신의 이름이나 작품을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내년엔 꼭 될 거야’ 하는 희망을 품는다. 그 정도까지 가는 것도 기적에 가까울 테니 지면에서 내 이름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포기하지 못하게 되는 일종의 희망 고문인 것이다.
한 사람의 당선자는 힘차고 밝은 기운으로 1월 1일을 맞이하겠지만, 그렇지 못할 수백 명의 응모자에 들 확률이 아주 높기 때문에 나 역시 매해 1월 1일을 허탈하게 보내야 했다.
실명으로 보내기도 하고, 될 것 같은 필명을 지어서 보내기도 한다. 시의 제목을 바꿔서 보내보기도 하고 낯선 동네의 낯선 우체국에 가서 응모하기도 한다. 매해 이루어지는 행사지만, 해마다 떨어지는 낙선의 고통을 실력에서 찾기보단 환경과 운을 탓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야 내년에 다시 응모할 힘이 생긴다.
대학원을 다닐 때 지방 신문사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었고, 그 후로 계속 도전한 서울에 있는 신문사 중 한 군데서 당선이 되면서 나는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가장 가까운 문우인 남편은 아직까지 신춘문예의 벽을 넘지 못했다.
남편과 나는 시 때문에 만났다. 시를 사랑해서, 시를 포기하지 못해서 결혼했다. 우리는 둘 다 시 동아리에 속해 있었는데, 시 쓰는 후배들과 각자 써 온 시로 합평회를 하고 밤늦게까지 대학교 교정을 돌아다니곤 했다. 후배들은 졸업하고 결혼하면서 이제 현재의 삶은 나누지 않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아직까지 시 쓰는지 궁금하지만 아직까지 등단하지 못해서 포기해 버렸을까 봐, 그래서 아플까 봐 물어보지 못했다. 한때 꿈꾸던 것이 오랜 시간을 지배해버릴 만큼 중요하지 않을 때도 물론 있다. 시를 썼던 한때의 시간이 소중했다고 떠올릴 정도의 여유가 있는지조차 물어보지 못했다.
나는 등단하는 동시에 아이가 태어나 시를 발표하는 일이 새벽에 깬 아이에게 젖 물리는 일만큼이나 버거운 과정이었다. 나는 최종심에 오르지 못하고 당선이 된 탓에 가능성을 가늠하지 못하고 얼결에 됐지만, 남편의 이름이나 작품은 최종심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보다 먼저 당선될 거라고 늘 생각했었다. 내가 넘지 못하는 정성과 열의를 청년의 남편에게서 보았기 때문이다.
남편이 시를 얼마나 열심히 써 온 사람인지 나는 알기 때문에, 때가 되면 신문사 공고를 확인해서 남편 책상에 놓인 달력에 ‘소인’과 ‘도착’을 표시해둔다. 보내야 할 전날, 갈색 봉투에 신문사 주소를 적어서 남편 책상에 놓아둔다.
그렇게 일이 많고 바쁘고 잠이 부족한데도 남편은 시 원고가 든 봉투를 식탁 위에 놓고 출근한다. 갈색 봉투에 들어간 남편의 원고가 혹시 서울까지 가는 동안 비나 눈이라도 맞아 젖을까 봐, 봉투가 찢어지기라도 할까 봐 테이프를 몇 번이고 붙인다. 유모차에 태운 아이의 몸을 담요로 덮고 우체국에 가서 저울에 남편의 원고를 올린다. 서울에 있는 모든 신문사에 응모해왔기 때문에 나는 부지런히 유모차를 끌고 자주 우체국에 갔다. 차가운 눈과 뜨거운 고독이 만나 유모차 바퀴가 눈길을 굴러간다. 유모차 속 아이들은 겨울을 보내는 동안 집에 두고 혼자 우체국에 가도 될 만큼 자랐다. 겨울만 자란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우체국 직원은 “어떻게 보내드릴까요?”라는 말만 하지만, 때론 “글 쓰는 작가이신가 봐요.” 하며 관심을 보이는 직원도 있다. 나는 “네, 작가가 되고 싶어서요.” 한다. 신춘문예가 등단을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은 “좋은 소식 있으면 저에게도 알려주세요.” 한다거나 “꼭 됐으면 좋겠네요. 글 쓰는 사람 보면 신기해요.”를 덧붙인다.
지금은 종이 영수증이 선택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익일 도착’으로 가장 빠른 등기를 보내면 종이 영수증을 발급해줬다. 나는 나와 남편이 응모했던 20대 때부터 내가 당선이 되고 난 후 남편의 원고를 보낼 때마다 늘 종이 영수증을 모아뒀었다. 여행 갔던 기차표나 관람권 같은 것도 모아두는 성격이었으므로 종이 영수증을 모으는 것은 아주 당연하게 생각되어서 시작한 일이었다. 또한, 언젠가 우리 둘 다 당선이 되고 나서 돌아보면 어떤 관문을 통과한 사람이 흔히 말하는 ‘나를 강하게 만든 실패의 추억’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면 영수증에 찍힌 잉크가 날아가서 희미해진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 후부턴, 우체국에서 영수증을 받자마자 복사해서 파일에 정리해두었다. 그 모든 영수증이 모여 한 권의 파일을 꽉 채우고도 남았다. 그 긴 시간 동안 남편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출근하는 남편이 오늘은 꼭 기자로부터 당선 전화를 받으리라 기대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크리스마스 때까지 전화를 받지 못한 남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웃었지만 나는 남편의 쓸쓸한 마음을 눈치채기 싫어 어느 때부턴 ‘신춘문예’라는 말은 꺼내지 않기로 했다. 심사평을 읽어보는 일도 당선 시를 찾아보는 일도 그만두기로 했다. 납작 엎드린 슬픔이 그의 곁에 머무는 동안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기로 한 남편의 마음을 나 혼자 짐작해본다.
이제 이 과정은 그저 해가 뜨면 아침이 시작되고 해가 지면 저녁이 시작되는 일처럼 당연해서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었다. ‘포기’라는 말을 할 필요 없는 일, 그저 밥을 먹고 나서 양치를 하는 일처럼 매우 당연해서 몸이 알아서 그쪽으로 기울이게 되는 일.
몇백 번인지도 모를 신춘문예 낙선의 기록. 2019년에 있었던 행정안전부의 <실패박람회>에 남편은 이 종이 영수증의 기록으로 인터뷰를 했다. 대부분의 사람에겐 자명하게 실패한 기록이지만 남편에겐 부끄러운 기억이 아닌 것이다. 몇백 번의 실패 경험을 가졌음에도 인터뷰를 하고 사람들 앞에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가 가지지 못한 남편의 이러한 점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나는 앞으로도 우체국에 가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남편의 오른손은 시를 쓰고 왼손은 그림을 그린다. 화가가 되고 싶었다기보단 시 쓰는 마음이 물감을 만났을 뿐이라고 믿고 있다. 시를 쓰듯 그림 그리고, 그림 그리는 왼손의 서툴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사랑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