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게세에서 읽는 시 13
강윤미
이젤의 긴 다리가 자신의 다리와 닮았다는 사실에
너는 한동안 멍해 있을지도 몰라
깨달음은 하루살이처럼 날아드는 법이니까
기린 그림을 그리기 위해 너는
기린을 보기 시작했어
입장료만큼의 몸값으로 서 있던 기린들은
너의 눈빛에 묻은 생각을 알아차리고
순순히 이젤이 되어 줄 테고 말야
어린 노란색으로부터 늙은 갈색으로 이어지는 고민이란
유년에 밟았던 흙의 빛깔에 머무르겠지
너의 몸은 아프리카의 땅을 닮았으니까
사자의 거친 숨소리가 허공을 갈기갈기 찢으며 쫓아오는
어린 기린의 길을 기억하기 위해
몸에 지도를 새기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지
슬픔의 높이를 잴 수 있다면 나는 먼저 너를 떠올릴거야
무게를 받치려고 두 다리는 목의 길이만큼 진화해가고
몸은 소화되지 못한 울음 마냥 부풀어 올랐다는 걸 알아
이쯤 되면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고?
목이 긴 여자를 그리기 위해 눈동자를 훔친 모딜리아니를 생각해
목을 내밀어 그림 속 여자의 앙다문 입술에 귀 기울여봐
여자의 말은 눈동자 속에 있고
너의 목소리는 미로 속에서 길을 잃지
나는 그 무늬의 자물쇠를 열고 네가 되는 상상을 해
나뭇잎에 가까운 생을 산다는 것은
떨어지는 것들을 동경한다는 거야
별똥별은 떨어지기 위해 매일 조금씩 위로 솟구치고
어둠은 밤으로부터 차근차근 물들지
어쨌거나 너의 몸을 꽉 짜면 흙냄새 나는 물감이 뚝 뚝 떨어질 것만 같아
땅을 밟을 때마다 너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동물원의 도화지 위에서 나도 모르게 알아버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