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월드 스파이시 이후, 흐름에 대하여
블랙 맘바부터 걸스 정도까지는 에고와 자아에 대한 이야기가 전반적으로 다뤄졌다. 메타버스라는 소재 안에서 거울 속의 나는 내가 아닐까와 같은 가사로 이를 표현했다. 이는 거울로 한 번 비춰진 나, 즉 거울이라는 대상체의 필터로 한 번 걸러진 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 거울 속의 나를 보는 상황에 sns 속 우리가 직접 구성하는 만들어낸 나를 보여주게 된다. 일종의 복사본, 페르소나와 같은 의미다. 에스파는 당시 2020년 메타버스의 유행 속에서 이러한 자아상에 대한 근본적 고찰을 메타버스와 접목시킨 것이다. 특히 데뷔곡인 블랙맘바부터 이 블랙맘바를 처단하는 걸스까지는 이 세계관 강조가 두드러진다.
하지만 그 이후로 오랜 공백과 더불어 여러 내부적 문제로 전환점을 찾아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 그렇게 탄생하게 된 것이 스파이시다. 이지 리스닝 혹은 2세대의 향기를 풍기는 뉴진스, 아이브와 같은 대중이 열광하는 컨셉에 에스파도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극도의 쇠맛만을 추구하는 마이너한 코어 팬층(나와 같은)을 어느 정도 포기하더라도 충분히 해볼 만한 도전이었다고는 생각한다. 중요한 건 '에스파도 하이틴이 가능하다'였으니까. 그룹의 성장 지표나 대중적인 반응 또한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부분과 더불어 전체적 앨범 흐름의 유기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도 가했다. 솔티 앤 스윗 같은 커플링 곡이나, 갑작스레 현실성이 가미된 컨셉의 명분으로는 에스파가 사는 리얼 월드의 차원을 보여준 것이다 하는 설명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이는 충분히 스핀오프격으로 풀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다양한 컨셉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며 에스파는 그동안 dreams come ture나 life's too short 같은 곡도 선보인 적 있다. 오히려 디싱으로 스파이시를 빼고 바로 후속 앨범으로 본디 에스파가 가진 스타일을 선보였다면 유기적 흐름이 더 돋보였을 것 같다는 개인적 의견이다.
더불어 너무 빨리 현실 세계로 나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아, 복제, 자아상과 뒤틀린 나를 말하는 모든 문학과 영화 등 작품에서는 무언가를 거치지 않은 진짜 나를 내가 스스로 아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가치관을 전한다. 에스파는 이것으로 보자면 이 사실을 너무도 빨리 깨달았다! 그래서 의문이 드는 것이다. 드라마 뒤에 무엇을 할 것인가. 트라우마와 맞서 이겨낸 에스파가 어떤 것을 이야기 할 것인가. 굉장히 기대가 되면서도 동시에 정체성과 자아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 의문이 남는 것이다.
ae- 들은 쉽게 말하자면 에스파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메타버스 속 이들의 제2자아라고 보면 된다.
세계관 필름에서 아이 카리나가 카리나에게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아이 카리나는 나에게는 어떠한 나쁜 일도 없을 것이며 늙지도 않는 나에게 너는 대적이 되지 않는다고 카리나를 겁먹게 한다. 이 점에서 나는 아이(ae)들의 존재감을 실감했다. 그때 처음, 엄청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카리나의 압도적인 외모로 진짜 카리나보다 더 완벽한 가짜 카리나라는 것에 대해 설득력을 키우는 문제가 존재하지만, 이런 복제된 정체성, 그러니까 '분명 나를 따서 만들었는데 나보다 더 잘났고 나보다 더 좋은 게 많고 나보다 더 장점이 큰 나를 능가하는 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마냥 걸크러쉬가 아닌 특별한 지점을 만드는 것은 어렵고 복잡하게 아바타도 만들며 노력한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 가짜 자아, 나를 능가하는 가짜 나의 정체성과 진짜 나의 대립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에스파가 주인공인 영화에 가장 큰 빌런이 아이에스파인 구도는 이미 다른 작품들에서 많이 차용된 클리셰지만 확실히 주제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자아정체성과 주체적 여성상을 말하는 여자 아이돌들은 4세대가 되어 차고 넘치게 되었다. (그것이 모험을 떠나는 소녀들이든, 혹은 독기와 야망 품은 나이든) 하지만 내가 만든 가짜 나에 대한 고민과 성찰로 그 불안함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약한 점을 드러내는 것은 누구나 한 선택이 아니다. 분명히 더 끌어낼 수 있으리라고 본다.
소품 요소적인 걸로는 드라마는 노래나 분위기 자체는 본디 쇠맛을 추구하지만, 여태 에스파가 보여주던 광야 속 플랫과는 다른 인상을 주었다. 때문에 리얼 월드에 이들이 맞서 싸우던 그 세상이 잠시 튀어나온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즉 드라마는 그 자체로 원래 에스파가 주던 에스파스러움은 나는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에스파의 정체성 자체를 덜어낸 이유는 sm의 경영 개편 이후 준비를 가하고 나오게 된 에스파의 사실상 첫 앨범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에스파는 이미 앞서 에스엠의 여러 남자 아이돌들이 시도했던 자아 찾기, 주체 자아의 총체를 보여준다. 하지만 예전의 에스엠과는 분명히 구분이되는 확실한 관점과 지점이 필요했고 이를 스파이시와 드라마로 찍었다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는 인식 벗어나기 과정을 거친 결과물이라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 때문의 에스파가 가진 컨셉과 브랜드 자체의 유기성은 어느 정도 엇나갔다고 본다. 이를 감수하고서라도 선택한 경영적 이유를 절대 비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본디 한 앨범이었던 곡들을 분해하여 다른 타이틀과 함께 재조립해 나름의 유기성을 챙기려고 한 점은 좋다. 내 에스파스러움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길어지지만 말이다. 공전 궤도를 안전히 돌 수 없는 우주비행사들의 위기상황에 그대로 목숨 걸고 궤도를 돌기를 바라는 것은 이기적인 일이다. 때문에 에스파의 긴급 탈출 스파이시를 나는 응원했다. 드라마 또한 그렇다. 이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보고 싶다.
정리되지 않은 관련 사담 1
에스파는 드라마 컴백 당시 공식적인 기사에서 쇠맛을 되게 이렇게 기대해 주신 분들이 있어서 이번엔 쇠맛 노래를 들고 왔다라고 본인들이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이러한 나의 공격적인 니즈도 충분히 고려되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말해준 아주 고마운 사항이다. 때문에 드라마는 원래 궤도의 진입하기 전인 과도기의 로켓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블랙맘바는 데뷔곡에서도 등장한 그 존재감에 비해 너무 빨리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비슷한 대체재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애초에 블랙맘바를 일찍 죽인 것에 대한 이유를 조금 더 생각해보자면, 제대로 결론을 내는 것의 중요성을 느낀 것이 아닐까 싶다. 이미 SM 소속의 여러 아이돌들의 세계관이 뭔가 하나의 주제를 계속 끌고 가다가 처음 중간 끝이 없이 모든 게 순환 구조로 되어버린, 이야기에 어떤 중점이랄 게 없어진 경향이 있다.(이들의 스토리가 방대하고 계속 팀이 이어지며 수명이 늘어난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흐름을 길게 가지는 바람에 구축되지 않는 결론을 느껴 긴 흐름으로 잡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블랙맘바는 1차 빌런일까?)
정리되지 않은 관련 사담 2
앞서 이야기한 것을 정리하며 결론을 내리자면, 이제 어떤 앨범이 내게 찾아올 지 아주 궁금하다. 리얼월드에 더 머무를 수도, 아니면 적당한 쇠맛의 드라마 수준의 곡과 청순발랄한 느낌의 곡을 커플링 곡으로 함께 나올 수도 있다. 내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내가 생각해보지 못한 돌파구로 에스파가 컴백할 수도 있다. 엔터테인먼트가 아트가 아닌 점은 인지하고 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실용 예술이기 때문에 예술을 위한 예술보다는 다른 지점이 분명히 있다. 만일 대중이 유기성을 따지지 않는 그런 니즈를 원한다면 들고 나올 의무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지점에서는 굉장히 슬프지만 나의 이런 관점에도 불구하고, 유기적인 흐름은 어느 정도 벗어나더라도 SM이 말하고 지키고자 하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에스파가 꾸준한 성장으로 실적을 내는 것을 나 또한 기대가 된다. 말은 많았지만 내가 남기는 마지막 말은 이것이다. 나는 에스파를 응원한다.
*주어진 정보의 개인적 해석을 담아 사실 혹은 공식과 다른 내용이 포함될 수 있다는 점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