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나에게 기회는 올까

희미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희망

by 고요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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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설레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럴 나이도, 그럴 상황도 아니라고 믿었다.
이혼한 지 몇 해가 지나고,
혼자 사는 삶에 점점 익숙해지면서
내게 더는 특별한 일이 일어날 리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날,
아무 예고도 없이
어떤 감정이 슬며시 찾아온다.


그건 아주 잠깐,
스쳐가는 바람 같기도 하고
드라마 한 장면처럼
내게만 잠시 멈췄다 가는 ‘기회’ 같기도 했다.





공원, 오후 세 시의 햇살


그날은 평범한 토요일이었다.
아무 약속도 없고, 집안일도 특별한 건 없었다.
햇살이 좋아 괜히 기분이 나아져서
가까운 공원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흰셔츠에 청바지,
얼굴엔 가벼운 선크림만 바른 채
이어폰을 꽂고 천천히 걸었다.


공원은 평화로웠다.
아이들은 킥보드를 타고,
노부부는 벤치에서 손을 잡고 있었다.

나는 걷고 있었다.
조금은 허전하게, 조금은 담담하게.


그런데 내 앞에 지나가던 남자 한 명이
갑자기 떨어뜨린 휴대폰을 줍기 위해
급히 방향을 틀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그는 급히 내 앞을 가로질렀고,
나는 놀라면서도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짧은 순간,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웃고 있는 것도,
말을 건 것도 아닌데
나는 순간, 이유 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사람은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다시 반대편 길로 걸어갔다.


끝.
정말, 그게 다였다.

하지만 나는 그날 밤
그 장면을 몇 번이고 떠올렸다.

왜일까.
그 사람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오랜만에 ‘누군가와 마주친 감정’이
내 안에서 작은 물결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설레는 감정이 낯설어진 나이


이혼 후 나는
어떤 관계도, 어떤 만남도
계산하게 되었다.

‘이 사람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
‘이 감정이 오래갈 수 있을까’
‘결국 또 상처로 끝나는 건 아닐까’


그래서 처음부터
감정을 누르고, 차단했다.

“이젠 그런 거 바라지 않아.”
“혼자가 더 편해.”
“괜히 기대하면 실망만 커져.”


그런 말들을 너무 많이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진짜 그렇게 믿게 되었다.

그런데 공원에서 스친 그 짧은 순간은
그 모든 믿음을 살짝 흔들었다.


“아직… 나는 누군가를 향해 마음이 움직일 수 있구나.”

그 깨달음은 놀랍고,
조금은 서글펐다.

왜냐면
그 감정조차도
“어차피 스쳐가는 일이야”라며
미리 단정지어버리는
나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라는 말과 함께 살아가는 법


친구가 한 번은 내게 말했다.
“그래도 다시 누군가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젠 그런 에너지가 없어.”

그 말엔 진심도, 회피도 섞여 있었다.


누군가를 다시 만나는 일은
단지 감정이 아니라
용기, 체력, 신뢰…
그 모든 것을 다시 꺼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혼자 사는 지금의 삶은
비록 가끔 외롭더라도
덜 흔들리고, 덜 아프다.


그러니까
‘기회’라는 단어가
때로는 ‘위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상상한다.


누군가와 커피를 마시고,
같은 영화를 보고,
“이 장면 참 좋다”고 말하며 웃는 모습.

그런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 아닐까.




돌아오는 길, 길게 남은 여운


그날 이후,
나는 그 공원을 몇 번이나 다시 찾았다.

우연히라도 그 사람을 마주칠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누구였는지,
어디에 사는지,
이름도 모른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의 존재는 내 안에 오래 남아 있었다.


그날의 햇살,
벚꽃이 떨어지던 바람,
그리고 짧게 마주쳤던 눈빛.

나는 그것만으로
한동안 마음이 따뜻했다.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 순간의 ‘내 감정’이 나를 위로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누군가에게 마음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구나.”

그 사실이 나를 울게 했다.


기회는
꼭 사람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무뎌졌다고 생각했던 감정을
다시 느끼게 해준 순간들.

그것이
내게는 다시 살아갈 용기를 주는
조용한 기회였다.




그럼에도, 나에게도


지금도 여전히 혼자 살고 있다.
주말엔 혼자 밥을 먹고,

퇴근하면 불 꺼진 집에 들어간다.


예전보다 조금 더 단단해졌고,
조금 더 자유로워졌지만,
가끔은 그 공원에서 마주친
낯선 사람의 눈빛이
문득 떠오른다.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은 건 아니다.

그저
그날 내가 느꼈던 감정처럼,
언젠가 또
내 마음을 건드리는 사람이
나의 삶 어딘가에서 스쳐가주기를 바란다.

그게 짧아도 괜찮다.
지나가도 괜찮다.


중요한 건
내가 여전히 ‘마음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에게도 기회는 올까.


아주 작고, 아주 조용한 설렘이
어느 날 또
불쑥 내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이번엔 한 발짝쯤
내가 먼저 다가가볼 수 있을까.

아니,
그저 그 순간을 피하지 않고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조용히 바라볼 수 있기를.


그것만으로도
내 인생은
다시 시작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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