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의 공간 이야기
지금도 서울에서 이발은 4,000원, 염색은 5,000원에 할 수 있는 그곳. 한 때 유명 연예인의 입주 열기로 뜨거웠지만 지금은 닭볶음탕으로 유명한 '계림'을 찾는 것이 아니라면 딱히 갈 일 없던 그곳. 세운상가가 변했다. 단순히 리모델링이나 재건축과 같은 방식의 변화가 아니다. 세운상가의 정체성이 변한 것이다. 그것도 아주 산뜻하게.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세운상가는 '한 때' 부의 상징이었으며, '한 때' 전자산업의 메카로 불린 곳이다. 4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지나온 역사와 함께 쇠퇴하고 이미지가 후퇴한 곳이다. 아마도 2017~18년까지만 해도 세운상가에 대해서 20대들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30대 중후반 정도 돼야 가물가물하게 기억할 수 있었던 세운상가가 대대적으로 변했다. 단순히 한두 개 맛집이나 핫플레이스가 입점해서가 아니다. 유동인구 유치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 입지와 상권 생태계 형성에 공들인 결과물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인상적이다.
솔직히 이곳이 '다시-세운 프로젝트'라는 도시재생사업지로 선정됐을 때만 해도, 전혀 관심 없었다.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도 있었지만, 물리적, 인식적으로 낡은 이 장소에 대한 기대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올해만 해도 벌써 세 번째 방문하는 이유는, 방문할 때마다 마주하는 이벤트, 방문하며 경험하게 되는 색다름이 매번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기존에 폐쇄적이었던 아케이드형 상가 구조에서 열린 '광장'형 구조로 개선시키면서 실제로 이 광장형 구조에 사람들이 신박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세운상가 입구에 서면, 처음에는 상당히 이질적이지만 곧 다른 세계에 온 것만 같은 '광장'이 방문자를 맞이한다. 한국인이 파리와 같은 노천 문화를 동경하는 심리를 잘 간파한 구조다. 우리는 유난히 열린 광장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문화에 찬사를 보내는데, 그만큼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하기 희귀한 환경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세운상가는 입구부터 우리를 반긴다.
평소 같다면, 입구만 그럴듯하고 콘셉트로 치부할 수 있겠으나, 세운상가의 도시재생사업은 상가 전반적인 공간에 이런 오픈형 공간 디자인을 고려해 기획한 것을 알 수 있다. 폐쇄적인 공간을 개방적인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세운상가는 단순히 양쪽으로 폐쇄적인 상점들이 나열돼 있던 구조다. 지금은 입구에서 시작되는 광장을 시작으로 상가 전반에서 최대한 '광장스러움'을 녹이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그중에 하나가 정기적인 플리마켓이다. 요 한 달 서울 도시건축 비엔날레라는 테마로 진행돼 세운상가에서 체계적으로 기획된 플리마켓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 플리마켓 또한 세운상가의 광장스러움을 자연스럽게 녹이고 있는 일종의 무대다.
최근 플리마켓은 기존과 다르게, 셀러들의 전문성이 강화되고 아이템의 퀄리티도 웬만한 고급 편집샵 못지않다. '장사'가 아닌 '열정'과 '퀄리티'를 파는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덕분에 셀러들과 '거래'가 아닌 '관계'를 만들게 되고, 이 대표격이 띵굴 시장이라는 이야기도 했었다.
아무튼 2019년의 플리마켓은 단순히 '제품을 사고파는 경험'이 아닌 '열정과 힙스러움을 공유'하는 장이 되고 있다. 세운상가에서 만날 수 있는 셀러들 또한 그러했다.
플리마켓은 거리를 걷는 '맛'을 제공한다는 데서 도시재생의 필수품이 된 듯하다. 그렇지 않아도 높아진 퀄리티 덕분에 이 거리를 관통하는 시간은 예전보다 '배'로 들곤 한다. 이 날도 셀러 한 분 한 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관심 가는 제품 앞에서 자연스럽게 셀러와 대화하게 된다. '이거 얼마예요?'라는 대화보다 '정말 예뻐요', '이것은 어떻게 만든 거예요?'라는 대화는 상가의 입구에서 시작된 광장 문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동안 '신구조화'라 함은 옛 것은 그대로, 새 것은 파격적으로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만큼 공간적으로, 하지만 강제적으로 신구조화를 자주 봐왔던 나라면, 세운상가의 신구조화는 밸런스가 있는 조화다. 세운상가의 F&B는 이질감이 덜하다, 이유인즉슨, 인테리어부터 간판의 폰트까지 이 곳에 최적화된 뎁쓰를 찾았기 때문이다. 음식과 음료의 맛도 중요하지만, 그 맛을 배가시켜주는 분위기의 일관성이 아주 적절하다.
아쉽게도 일요일인 오늘 세운상가의 잇하디 잇한 그곳, 다전식당은 휴무일이다. 이곳은 말 그대로 을지로와 세운상가 변화의 중심에 있는 곳이다. 이 근처를 온다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인데, 궁금하다면 녹색창에서 검색해보길 권장한다. 삶이 권태롭다면, 진심으로 추천할만한 경험을 제공하는 음식점이다.
구경을 다했다 싶었는데, 눈에 익은 카페가 하나 보인다. 이태원에서 핫한 '챔프 커피'다. 챔프 커피가 세운상가에 있다니, 처음에는 팝업스토어인 줄 알았다. 그런데 메뉴를 보니 '을지로 커피'가 있다. 아무래도 '입점'을 한 모양이다. 챔프 커피 또한 이태원에서 내로라하는 '광장'과 '대화' 문화를 이끌어내는 곳이다. 이 곳 정체성에 맞게, 노상에 적절한 테이블(?)과 의자를 비치했다. 쉬었다 가기 딱 좋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챔프 커피에서 머무른 10분가량의 시간은 의미가 있었는데, 일도 쇼핑도, 데이트도 바쁘게 하는 우리네 일상에서 한 줄기 쉼표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덕분에 플리마켓에서 '이쁘다, 이쁘다', '신박하다'했던 아이템들을 하나둘씩 꺼내볼 수 있는 시간으로도 쓸 수 있었다. 별 거 아닌 것 같은데, 별 것들이 있는 곳, 세운상가가 이렇게 변했다.
옛 것도 잘만 관리하면 구관이 명관이지만, 세운상가처럼 이렇게 미래지향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공간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세운상가의 번성은 근처 상권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기에 세운상가는 종로구 번성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장소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세운상가 중심부를 기점으로 여러 장소가 취합되며 주변 경관까지 개선되는 향후 1~2년이 더욱 기대된다. 적어도 이곳은 강남역보다는 재밌는 경험을 할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힙스러움을 중시하는 Z세대들에게 더 관심받기도 할 테다.
세운상가는 지난 과거와 타협하고 다시 '세계의 기운이 모이는 상가'로 이제 막 내디딘 느낌이다. 단순히 신구의 조화가 온화로운 장소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볼거리가 가득한 공간으로 정체성을 잡아간다면 도시재생의 의의까지 잡을 수 있겠다는 인상을 받는다.
더불어, 근처 익선동과 을지로 상권이 '힙스러움'을 중심으로 부흥하고 있는 가운데 세운상가의 이러한 '광장 공간' 제공은 여러모로 상징성이 느껴진다. 상권이 발달하며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젠트리피케이션도 이런 도시재생 방식으로 재탄생한 상권에서는 조금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생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