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의 공간 이야기
다소 좁고 복잡한 한남오거리 골목을 걷다 보면 불현듯 '여기 들어가도 되나?' 싶은 공간이 나타난다. 이미 인싸들에게 핫플레이스가 된 사운즈한남이다. '도시 속 리조트'를 표방하는 공간인만큼, 빼곡히 들어선 건물들을 보며 생기는 피로감을 씻을만한 한적한 공간 경험을 제공하는 곳이다.
사운즈한남은 맛집 하나만 보고 방문하는 휘발성 강한 공간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 곳이 색다르고 인상적인 공간 경험을 제공하는 이유는 비정형화된 공간 구조와 높낮이 속에서 입점한 브랜드 간 유기적인 동선과 공간마다의 몰입감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문하면 입구에서부터 느낄 수 있는 적당한 폐쇄성과 함께 의외성 있는 개방성이 공존하는 사운즈한남은 마치 한적한 작은 동네에 들러 잠시 쉬어가는 '쉼표'같은 인상을 남긴다.
사운즈한남은 빌라와 상가들에 겹겹이 둘러싸인 골목길에 뜬금없고 도도한 정제미를 날린다. 공간에 대한 정체성을 알 수 있는 커다란 간판이나 입점 브랜드가 손쉽게 판단되지 않아 안으로 들어가 보지 않고는 못 배기는 구조다. 아마 처음 방문하게 된다면 여기가 입구가 맞는지 둘러보게 된다.
입구에서부터 유럽의 노상 문화를 떠올리게 하는 카페&베이커리 콰르텟과 함께 이솝 스토어를 만난다. 이솝의 오프라인 스토어는 스토어가 위치한 지역과 거리를 고려해 차별화된 인테리어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운즈한남에 입점한 브랜드들은 하나같이 이 공간과 잘 어우러진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면 콰르텟이라는 베이커리는 얼마 전 처음 알게 된 브랜드다. 맛집 여부를 떠나 이 공간에 최적화된 느낌을 주니 블로거 리뷰를 검색해 보고 싶은 느낌은 사라진다. 음식 맛 그 자체보다 '공간과 잘 어우러진 장소에서의 한 끼'로 다가와 분위기를 먹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체감적으로 사운즈한남의 연면적이나 대지면적이 넓지는 않아 보였다. 하지만 비정형적으로 설계돼 동선을 찾는 과정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눈이 가는 곳마다 의외성을 계속 발견하는 것이 오히려 재미로 다가왔다.
1층과 반지하 사이 높이로 보이는 어느 한식집은 외딴 지역에 있었다면 한식집이 맞는지 의아한 외관을 가졌지만, 이 곳의 공간 정체성과 함께하며 불편함은 사라진다.
이 곳은 오피스, 주거공간도 있고, 각종 브랜드와 편의점까지 있는 복합 공간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브랜드는 놀랍게도 독립서점인 '스틸북스'다. 간단히 말하면 서점, 설명을 덧붙이자면 서점 테마가 강한 큐레이션 편집샵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독립 서점답게 일반 서점과는 다른 구조다. 1층은 매거진, 2층은 라이프스타일, 3층은 예술, 4층은 인문학 등으로 층간 큐레이션도 돼 있는 상태고, 층마다 전시된 책들도 세부 테마와 관심사에 맞게 자리하고 있다. 취향을 제안한다는 일본의 츠타야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동선과 공간에 대한 경험은 스틸북스가 츠타야 서점보다는 조금 자연스러웠다.
스틸북스는 내가 관심 있어할 만한 서적을 추천해주기도 하지만, 맥락에 맞는 소품과 굿즈, 작품들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제공한다. 마치 하나를 얻으려고 왔는데, 셋을 얻어가는 기분이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지적인 사람, 고상한 사람이 된다는 느낌도 사뭇 받을 수 있다. 어쩌면 이 공간에 방문해 최신 서점의 트렌드를 향유하고 있다는 만족감일 수도 있지만.
1차원적인 큐레이션이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드는 정도에 그친다면, 정말 훌륭한 큐레이터는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흥미는 있는데 어떤 정보를 찾아야 할지 모를 때, 오히려 우리에게 '이런 책은 어때요?'라고 추천하는 큐레이팅을 스틸북스에서 만나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사운즈한남의 공간 경험이 더 인상적인 순간이었다.
'서점'이라는 공간을 체험하면서 다양한 감각이 느껴져 지루함이 덜하다. 특히 층마다 유사하지만 조금씩 다른 채광과 오브제 배치들은 책을 보며 피로한 눈과 머리를 잠깐이나마 쉬게 해 준다.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고 다시 내려와 돌아보니, 공간의 '효율'보다는 공간의 '역할'에 신경 썼다는 것을 느낀다. 사운즈한남의 노상 공간은 언제든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공간이다. 목적이 분명한 공간 소비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 공간이 주는 편안함은 자연스럽게 체류 시간이 늘어나며 대화를 이끌게 되는 매력이 있다. (어쩌면 그래서 기본 발렛 시간이 2시간일까)
조금 더 걸으면 뭐가 있을까 궁금한 순간에는 오히려 공터가 나온다.
그리고 무언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세 갈래 길에서는 꽃집을 만났다.
브랜드도 없고, 볼 것도 없는 공간도 포인트는 배치했다. 한 바퀴를 돌았을 때, 머릿속에 남은 건 이 인공적인 공간이 참으로 인간적인 공간이라는 점이었다.
입구로 다시 나오니 그때서야 간판을 마주했다. 입점한 브랜드가 나열돼 있고, 사운즈한남이라는 텍스트가 있지만 뭐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확실히 이 곳은 '힐링했네'라는 인상을 주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한 방문객들은 이 곳에서 무엇을 소비할까? 돈도 돈이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몰입감일 것이다. 번뇌는 잊고, 반강제적으로(긍정적으로) 다른 생각과 경험을 제공하는 차별화된 공간 소비가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득 사운즈한남은 최근에 이슈 되고 있는 빈집 재생 프로젝트나 리모델링 사업에 참고할만한 공간이 아닐까 싶었다. 무엇보다 층간 경계의 모호함과 의외성이 공간에 재미를 상당히 더해주기 때문이다. 여기에 공간과 입점 브랜드의 정체성이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으니, 아무래도 이 곳은 힐링하고 싶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날 곳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