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가 고(告)함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알 수 있는 법이다. 코시모가 없는 피렌체는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를 쫓아낸 알비치는 7만의 피렌체 시민을 건사할 능력이 없었다. 너희들의 시대에도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여 모함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말한다. 자기가 그 자리를 맡는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하지만 그들이 잘하는 것은 남을 험담하는 것뿐이다. 그들은 더러운 입술을 놀리는 데에만 능하지 손발을 효율적으로 움직일 줄은 모른다. 그렇게 그들의 조직을, 나라를 망가뜨린다. 대신 변명한다. 바뀌지 않는 세상은 모두 전임자의 책임이라고, 자신들이 주도하는 변화를 거부하는 기득권의 저항 때문이라고. 그리고 진실을 호도한다. 그래도 자기들이 노력해서 이나마라도 나아진 것이라고. 그런데도 그들을 따르는 모자란 울보들은 눈물을 훔치며 열광한다.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고 자위하면서 말이다. 알비치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피렌체 시민들은 다행히도 '모자란 울보들'이 아니었다. 알비치의 무능과 타락을 눈치챈 그들은 1년 만에 그를 영구 추방시켜 버렸다.
이제 피렌체를 이끌어 나갈 자는 없었다. 커다란 권력의 공백이 생긴 것이다. 시민들은 입을 모아 이 자리를 메꿔 줄 사람의 이름을 외쳤다. 그것은 베네치아로 유배 간 코시모 데 메디치였다. 먼 곳에서 몸을 낮추고 있던 코시모는 시민들의 부름을 받아 피렌체로 돌아온다. 그것은 마치 개선장군의 귀환과 같았다. 당나귀에 탄 그가 성문을 들어설 때 시민들은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코시모는 그의 상징과도 같았던 붉은색 모자를 쓴 채였다. 그리고 그것을 벗어 환영하는 시민들에게 흔들어 주었다. 그는 1년 전 도시를 쫓겨날 때처럼 겸손하고 관대하였다. 그들을 모함한 사람들을 용서할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반(反) 메디치 음모에 가담했던 총 20개 가문에 속한 80여 명을 추방시켰고, 알비치를 포함한 11개 주동자 가문을 피렌체에서 영구 추방시켰다. 코시모는 자신의 손에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 저항 세력들의 싹을 자른 것이었다. 코시모는 은연자중(隱然自重)과 인내의 미덕으로 그에게 닥친 최대의 시련을 이겨내었다. 이제 피렌체에 코시모와 메디치가를 견제할 세력은 아무도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모든 정적을 제거한 1434년의 코시모에게는 이제 과도한 겸손은 필요치 않은 것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이제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435년 1월 그는 곤팔로니에레(시오노 나나미의 책에는 '대통령'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요, 사실 이 정도의 권력을 가진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임기도 1년이었고요. 하지만 마땅히 표현할 용어가 없는 것 같습니다.)에 취임했다. 이제 그는 피렌체의 명실상부한 일인자가 되었다. 모든 시민들은 그의 인격과 능력에 기대고 싶어 했다. 그는 시민들의 기대에 호응할 책임이 있었다. 크고 작은 도시 국가들로 조각조각 나뉜 이탈리아 반도에서 그의 도시를 지켜내야 하는 사명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여기서 머물지 않았다. 그는 단지 메디치가의 수장, 피렌체의 대표로 만족할 수 없었다. 전통적인 강국인 신성로마제국, 무섭게 커가고 있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야욕으로부터 조국 이탈리아를 지켜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이탈리아의 지도자라는 무거운 중책을 그의 어깨에 짊어지고자 하였다. 그의 책상에는 이탈리아의 지도가 펼쳐졌다.
코시모의 고민을 이해하려면 15세기 전반 이탈리아의 정치적 상황을 알아야 한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너희들이니 내가 간단히 설명해 주겠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당시 내 나라 이탈리아는 30개의 크고 작은 도시 국가로 나뉘어 있었다. 마치 그 옛날 중국 땅 춘추전국시대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당연히 모든 나라가 똑같은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대체로 5개의 강국이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북쪽에는 밀라노 공국(Duchy of Milan), 그 동쪽에는 베네치아 공화국(Repulic of Benice), 그리고 반도의 중북부에는 우리나라인 피렌체 공화국(Repulic of Florence)이 있었다. 남쪽 끝에는 나폴리 왕국(Kingdom of Naples)이 자리 잡고 있었고 나폴리와 피렌체 중간에는 로마 교황청과 교황이 다스리는 교황령(Papal states)이 끼어 있었다. 나라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통치 체제도 제각각이었다. 베네치아는 시민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 공화국이었으나 사실 몇몇 귀족들에게 권력이 집중된 과두정 체제(寡頭制)였다. 피렌체도 역시 공화국이라고 불렸지만 메디치가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참주제(僭主制)였다. 밀라노는 공작이 다스리는 공국, 나폴리는 왕이 다스리는 왕국, 교황령은 교황이 다스리는 군주제(君主制)였다. 5대 강국은 각자도생(各自圖生)을 위해 서로 동맹과 적대를 손 뒤집듯이 하는 이합집산을 거듭하였다. 나머지 작은 나라들은 거론할 필요를 못 느낀다. 그들은 각자 강한 나라에 이리저리 붙어 연명하고 있거나 아니면 용병을 조직하여 돈을 받고 군사력을 파는 뜨내기에 지나지 않았다.
코시모가 피렌체를 책임지게 되었을 당시 밀라노 공국은 남부지역의 나폴리 왕국과 서로 동맹을 맺고 있었고, 이들의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피렌체와 베네치아, 그리고 교황령이 연합하여 공화국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코시모가 추방 당시 망명지를 베네치아로 선택한 것도 베네치아가 오랫동안 피렌체와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베네치아가 그러한 그를 극진하게 대접해 주었던 이유도 코시모가 언젠가는 피렌체로 돌아가 지도자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돈독한 연맹 관계를 유지하기 원했던 것이었다. 이유없는 선의(善意)는 없는 법이다.
당시 밀라노를 통치하던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 공작과 나폴리 왕국의 아라곤의 왕 알포소 5세(Alfonso V of Aragon, 1442-1458 재위)는 동맹을 맺고 이탈리아의 북쪽과 남쪽에서 영토의 팽창을 꾀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무력이 약했던 피렌체는 이들 사이에서 샌드위치처럼 압박당하고 있었다. 위기에 처한 피렌체가 내릴 수 있는 외교적 선택은 제한적이었다. 베네치아와 교황청 사이에 맺어온 기존의 동맹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뿐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