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가 고(告)함
코시모가 1년 임기의 곤팔로니에레에 취임한 것은 1434, 1438, 그리고 1445년 세 번뿐이었다. 나머지 기간은 쉽게 다룰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을 그 자리에 앉혀, 전면에 나서지 않은 채 뒤에서 내정(內政)을 조정하였다. 하지만 외교에서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냉철한 안목과 장기적 계획, 그리고 인맥이 필요한 국제 관계에 있어서 그는 피렌체를 대표하는 군주처럼 행동하였다. 사실 베네치아 공화국을 제외한 밀라노, 나폴리, 교황청, 그리고 이탈리아를 둘러싼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스페인 등이 모두 군주제였기 때문에 그것이 더 편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는 심사숙고를 거듭하여 외교 정책을 수립하였다. 그것은 일종의 모험이자 도박이었다. 그동안 그의 아버지 조반니 디 비치와 함께 지켜온 메디치가의 굳건한 의리로부터 변화무쌍한 실리(實利)로 무게추를 옮기는 작업이었다. 동맹 관계의 재정립을 통해 '세력 균형'을 얻어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우선 전통적인 동맹이었던 베네치아와의 외교를 단절하였다. 베네치아로서는 참으로 큰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코시모가 알비치 일당에 의해 1년간 추방을 당했을 때에 베네치아는 국제 미아(迷兒)가 된 그를 따뜻하게 받아주었다. 그것을 배신한 것이다. 버림받은 베네치아는 동맹 파기를 문제 삼아 단독으로 피렌체를 칠 의지도 군사력도 없었다. 이미 그것을 간파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약육강식의 살벌한 본능만이 판을 치고 있는 15세기 이탈리아 반도에서 실리가 뒷받침되지 않는 의리를 고수하는 것은 동맹국을 껴앉고 낭떠러지로 다가가는 위험한 행위였다. 그는 메디치가의 신뢰를 양보하여 피렌체와 조국 이탈리아를 구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거둔 손을 밀라노 공국 쪽으로 향하였다. 그렇다고 당시 밀라노의 통치자 필리포 비스콘티의 손을 잡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앞으로 수 십 년을 내다보았다. 밀라노의 향후 패자(覇者)가 될 자가 누구인지를 예상하였다. 그는 바로 비스콘티의 사위인 프란체스코 스포르차(Francesco Sforza, 1401-1466)였다.
프란체스코는 원래 비스콘티가를 섬기던 용병대의 대장이었다. 비스콘티는 아들 없이 비앙카(Bianca)라는 사생아 딸을 하나 두고 있었는데 그녀를 프란체스코에게 시집보낸 것이었다. 따라서 큰 이변이 없는 한 밀라노의 차기 권력은 프란체스코에게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그의 어머니는 토스카나(이탈리아 중북부 지방으로 피렌체가 중심 도시) 출신이었고, 따라서 그가 유년 시절을 보낸 곳도 토스카나였다. 그 덕분에 프란체스코는 피렌체에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코시모는 그것을 이용하였다. 1435년 겨울 프란체스코를 피렌체로 초청하여 환대하였다. 이 야심에 찬 젊은이는 코시모와 몇 차례 회동한 다음부터, 그를 '아버지'라 부르며 따랐다. "코시모의 생각이 바로 나의 생각"이라고 늘 강조했을 정도로 코시모와 가치관과 정세 파악을 공유했다. 현명한 코시모는 프란체스코를 그의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호시탐탐 피렌체를 노리던 밀라노를 분열시켰다. 1440년 비스콘티의 밀라노 군대가 피렌체를 공격했을 때 피렌체를 도와 앙기아리(Anghiari) 전투의 승리를 이끌어 낸 것은 바로 침략자의 사위 스포르차의 군대였다. 이 위대한 승리는 후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의해 베키오 궁의 대회의실에 그려질 뻔하였다. '그려질 뻔하였다'는 표현을 쓴 것은 늘 그렇듯 공사다망(公私多忙)한 레오나르도가 진득이 벽화를 완성하지 않은 채 미완성으로 남겨버렸기 때문이다. 여하튼 장인과 사위 사이를 갈라놓은 코시모의 전략으로 피렌체는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 번째 위기의 바람은 남쪽에서 불었다. 나폴리 왕국의 알폰소 국왕이 교황령 군대와 연합하여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차지하고 있던 이탈리아 중부 지역을 공격해 왔다. 그뿐만 아니었다. 사위의 배신에 발이 걸려 약이 오른 밀라노의 비스콘티가 이들과 내통하여 북쪽에서도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전선(戰線)이 늘어지면 병력을 집중할 수 없어 패하는 것이 예사이다. 스포르차는 하루빨리 남쪽의 침략군을 물리치고 북쪽을 견제해야 할 판이었다. 피렌체로서는 프란체스코를 도와야 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 스포르차의 군대가 힘을 잃는다면 피렌체의 지원 병력도 큰 타격을 입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용맹한 프란체스코는 전쟁 경험이 풍부한 막강한 전력을 이끌고 아직 전열을 가다듬기 전인 나폴리-교황령 연합군을 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전후 협상은 신속히 이루어져야 했다. 명목상으로는 전쟁에 관여하지 않았던 코시모가 중재자로 나섰다. 페루자에서 열린 휴전 협정에서 코시모는 스포르차의 영토를 보존해주고 나머지 사항을 자신의 영향권 하에서 마무리 짓는 것으로 유도하였다. 일종의 야합이었다. 또 그만큼 코시모의 위상은 높아졌고 국가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제 남은 것은 북쪽의 밀라노였다. 자신의 사위였지만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던 스포르차가 나폴리 왕국과의 전투와 협상에 집중하는 동안 비스콘티가 이탈리아의 북쪽에서 세력 확장을 시도했다. 이번에도 코시모의 외교적 전략이 빛을 발하였다. 놀랍게도 일방적으로 동맹을 파기했던 베네치아를 꼬드겨 밀라노와의 관계를 이간질하였다. 양국 간의 사이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마침내 1446년 9월 외교상의 결례를 문제 삼아 베네치아와 밀라노의 군대가 충돌하게 되었다. 원래는 군사적으로 우월한 밀라노가 베네치아와의 전투에 집중하느라 잠시 한 눈을 팔게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결과가 의외였다. 가살마조레에서 베네치아가 밀라노를 대파해 버린 것이었다. 손 안 대고 코 풀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이제 코시모는 꿈에 그리던 5대 강국 간의 세력 균형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가 만들어 낸 이 힘의 평형추는 상당히 오랜 기간 이탈리아 반도에 평화를 유지시켜줄 것이다. 이탈리아의 평화가 유지되는 한은 프랑스도, 스페인도 섣불리 그들을 넘보지 못할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