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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벽돌 Feb 27. 2022

[한쪽 소설] 울보들아 들어라-13

마키아벨리가 고(告)함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피에로의 업적을 들자면 그의 아들 '위대한' 로렌초의 시대를 위한 기반을 다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가 심한 통풍(gout)에 시달려가며 살았던 5 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말이다. 너희들의 시대에는 통풍이라는 병이 별 것 아니게 되었지만 내가 살던 시대에는 그렇지 못하였다. 뼈마디에 쌓여가는 요산(尿酸)이 관절을 붓고 비틀어지게 하는데 그로 인한 통증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발버둥치며 괴로워해도 그놈의 애매한 병은 막상 숨통을 죄지는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를 유지한다. 그 극심한 고통은 명석한 판단을 내려야 할 뇌를 갉아먹고 불타는 의지를 다져야 할 심장을 더디게 한다.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피에로는 그에게 맡겨진 소명을 충실히 해내었다.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을 했을 그가 마음속으로 다졌던 메디치가와 피렌체시에 대한 의무는 무엇이었을까?


통풍, 1799년 제임스 길레이의 캐리커쳐 (위키피디아). 대표적으로 엄지발가락 관절에 극심한 부종과 통증을 유발하는데 그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못할 정도입니다


우선은 그의 아들 로렌초를 지도자로 키우는 것이었다. 피에로는 로렌초에게 그에게 어울리는 최고의 교육 기회를 만들어 준다. 자신의 육체적 결함과 부족한 정신적 능력을 실감하고 그가 직접 이루어 내지 못할 가문의 미래를 그의 아들에게 맡기려고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 코시모가 총애했던 플라톤 아카데미의 교장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로렌초의 개인교사로 임명하였다. 덕분에 로렌초는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로렌초는 선천적으로 동물적인 생존 감각과 정치 능력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거기에 탁월한 가르침이 더해지자 그의 능력은 원석이 다듬어져 찬란한 보석이 되어가듯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 빛이 주머니를 뚫고 새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메디치 반란 사건 (1466)'이었다. 당시 열일곱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메디치가를 노리던 쿠데타가 발발하자 그는 몸이 성치 못한 아버지를 지켜내고 조기에 반란군을 진압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스스로가 될 성 부른 나무의 떡잎임을 세상에 공표하는 기회였다. 피에로는 이 자랑스러운 아들에게 날개를 달아줄 기회를 노리게 된다. 그것이 로렌초의 결혼이었다.


로렌초 데 메디치 흉상


피에로는 장남 로렌초를 로마 명문가의 규수인 클라리체 오르시니(Clarice Orsini, 1453-1487)와 결혼시킨다. 오르시니 가문은 중세부터 총 세 명의 교황과 무려 서른네 명의 추기경을 배출한 바 있는 명실상부한 로마의 최고 가문이었다. 반면에 메디치 가문은 평범한 중산층 출신으로 작은 도시국가였던 피렌체의 간접적인 통치자에 불과했다. 이런 가문의 차이를 극복하고 보이지 않던 장벽을 허물어뜨리는 혼사를 어렵사리 성사시킨 것이다.


그것은 30년 간 피렌체와 이탈리아를 좌지우지하였던 코시모도 해내지 못했던 일이었다. 코시모도 며느리, 즉 피에로의 아내를 고를 때에 피렌체의 성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피렌체의 유력 가계의 하나인 토르나보니 가에서 고른 것이 고작이었다. 피에로는 이것을 깬다. 이제 '피렌체시의 메디치가'를 '이탈리아의 메디치가'로 격상시킨 것이다. 그것이 향후, 위기의 시대에 메디치가에서 2명의 교황이 선출되게 만들고, 끊어져가던 가문의 명맥을 튼실히 유지하게 만든 힘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그때는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오르시니는 로마 북쪽 일대에 널려있는 영지에 기반을 둔 봉건 영주였다. 영주의 지위는 교황에 의해 봉해졌으나 지리적인 이점 때문에 거꾸로 교황청에 대한 영향력이 상당하였다. 그것이 그 많은 교황과 추기경을 배출하는 젖줄이 되었다. 또한 오르시니 일족은 용병제도의 전성시대인 당시의 이탈리아에서 우수한 용병대장을 많이 배출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결국 피에로는 이 결혼을 통하여 오르시니가의 정치력과 군사력을 모두 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그를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의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었다.


혼담은 1468년 로마에서 성립되고, 결혼식은 이듬해에 피렌체에서 거행되었다. 신랑은 스무 살, 신부는 네 살 아래였다. 피에로는 이 일을 성사시키고 자기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했는지 그해 말에 고단한 생을 마감한다. 이제 메디치가에는 스무 살의 로렌초와 네 살 어린 남동생 줄리아노가 남았다. 어린 나이의 아들들이었지만 그들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물론 그 준비는 메디치가를 고작 5년 동안 거느렸던 피에로가 바쁘게 마련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누구보다 더 정확히 알았으며 그 불운한 생애에 자신이 하여하 할 일이 무엇인지 무섭도록 잘 깨닫고 있었다. 그가 마련해 준 발판을 딛고 로렌초와 줄리아노는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나, 마키아벨리는 로렌초가 피에로의 뒤를 이어 시대의 주역으로 등장한 1469년 태어났다. 따라서 내가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한 메디치가의 역사는 로렌초로부터 시작한다. 철저한 준비가 되어 있었던 로렌초의 시대도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아직 그가 꿈을 펼칠 만한 안정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그와 메디치가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있었다. 이것을 이겨내고서야 메디치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위대한' 로렌초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자, 이제 젊은 로렌초에게 닥친 위기에 대해 알아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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