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가 고(告)함
그 사건은 로렌초가 피에로를 뒤이어 메디치와 피렌체를 책임진 지 9년째 되는 1478년에 발생하였다. 후대에는 '파치(Pazzi) 가의 음모'로 알려졌을 것이다. 그 기간 동안 피렌체 공화국은 전에 없던 긴 평화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러한 평화 속에서도 불온한 세력들의 시기와 음모는 멈추지 않았나 보다. 이것은 내 생각에 로렌초의 아버지 피에로가 '메디치 반란 사건'에서 쓸데없는 관용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메디치가에 대든 세력들을 잔인하게 일벌백계(一罰百戒) 하지 않고 살려놓았기 때문에 메디치가를 고깝게 생각하던 귀족 집안들이 다시 고개를 쳐들 여지를 남겨놓은 것이다. 인간이란 생각보다 비열한 존재들이다. 가공할 공포를 맛보지 않는 이상 그 비극이 자기에는 닥치지 않을 것이라 낙관하는 습성이 있다. 그러한 습성은 메디치가에도 그리고 반 메디치 세력에도 똑같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느슨함이 불씨가 되어 똑같은 과오가 로렌초의 시대에도 또한 그 이후에도 반복되었던 것이다.
우선은 파치가가 어떤 집안인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파치 가문의 역사는 1088년, 제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원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무슬림 교도들이 장악하고 있던 예루살렘 성을 탈환하기 위해 무모할 정도로 용맹하게 가장 먼저 성벽에 기어올랐던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파치 가문의 시조인 파초 파치(Pazzo Pazzi)이다. 성스러운 십자군 전사로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파초 파치는 예루살렘의 예수 성모 교회에서 출토된 작은 부싯돌 3개를 포상으로 받아 고향 피렌체로 귀환했다. 이 부싯돌로 파치 가문은 자기 조상의 영웅적인 전투를 자랑하는 영리한 전통을 만들었다. 매년 부활절 기념 촛불에 점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첫 '성화(聖火)'를 이 성스러운 부싯돌로 채화했던 것이다. 상징은 전통을 만들고, 전통은 쌓여 권위를 부여하기도 한다. 이 부활절 전통이 공식화된 이후부터, 파치 가문은 기사 계급을 배출하는 명실상부한 피렌체의 명문가로 빠르게 성장했다.
그들은 사업에도 수완이 있었다. 14세기 중엽부터 다른 귀족가들처럼 은행업과 모직 산업에 뛰어들었다. 땅 짚고 헤엄치기만큼 쉬운 일이었다. 피렌체시 전체가 고도성장하던 시기에 그들의 사업은 실패할 이유가 없었고 당연히 엄청난 부를 쌓았다. 하지만 이 사업들은 메디치 가문과 겹치는 것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경쟁과 견제가 싹텄다. 이런 와중에 메디치가에 조반니 디 비치, 코시모, 로렌초 등의 탁월한 지도자가 연달아 탄생하며 범접할 수 없는 주도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주도권을 쥔 집단은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게 되어 있다. 메디치가의 '자기 우선권'은 파치가에게는 차별로 비쳐질 수 있었다. 경쟁에 밀려 상대적 차별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파치가의 사람들 사이에는 메디치에 대한 불만이 싹틀 수밖에 없었다. 흥미롭게도 여기에 힘을 보태어 파치가를 후앙질하는 인물이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 1471-1484 재위)였다.
"파치가의 음모'는 간단히 말해서 피렌체의 유력 가문인 파치가와 당시 교황 식스투스 4세가 결탁하여 벌인 메디치가에 대한 반란이었다. 이 사건도 당연히 뜬금없이 벌어진 것은 아니다. 수년 전부터 메디치와 파치, 그리고 교황 간에 일련의 사건들로 알력이 생기며 급격히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파치가의 일부가 유산 상속권을 주장하고 있었는데 로렌초가 특별법을 만들어서 기각해 버린다. 쌓아왔던 불만이 폭발하여 파치가는 메디치가에 대한 복수의 기회를 노리게 된다.
당시 교황이었던 식스투스 4세에게는 딸린 친척이 많았다. 교황이라는 성직을 맡았으면 그러지 말아야 했는데, 없이 자라 출세한 배경 때문인지 그는 유독 친족들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볼로냐 인근에 있는 작은 도시인 이몰라를 매입하여 자신의 조카인 지롤라모 리아리오 백작에게 넘겨주고 싶었던 교황은 당시 주거래 은행이었던 메디치 은행에 대출을 신청했다. 교황을 견제하고 있던 로렌초는 정치적 이유를 들어 이 대출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러자 교황은 1474년 7월, 메디치에 복수를 노리고 있던 파치 은행을 통해서 자금을 조달한 다음, 메디치 은행을 더 이상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것으로 충분한 복수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였을까? 그 해 10월, 식스투스 4세는 로렌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측근인 프란체스코 살비아티를 피사의 대주교로 임명했다. 살비아티는 파치 가문과 인척관계였다. 대출관계로 파치가의 신세를 진 교황청이 결국 다시 한번 파치 가문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피렌체의 영향권에 있던 피사의 대주교는 대대로 피렌체 정부의 결정에 따라 임명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피렌체의 실질적인 영주였던 로렌초의 동의 없이 대주교를 임명해 버린 것이다. 이것은 피렌체에서 로렌초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화가 난 로렌초는 살비아티 대주교의 피렌체 입성을 금지함으로써 교황청에 반발하였다.
교황과 파치, 그리고 메디치는 서로를 마주 보며 돌진하기 시작한다. 누구도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어찌 보면 피렌체와 토스카나에 갇힌 메디치가 보다는 전 이탈리아를 아우르는 권위를 가진 교황청이 더 유리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교황으로서도 로렌초에 충성하는 피렌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교황으로서는 해서는 안될 야비한 결정을 내린다. 파치가를 조정하여 로렌초와 그의 동생 줄리아노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들이 제거된다면 피렌체의 실권을 파치가에 넘겨주겠다는 조건을 달아서 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