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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벽돌 Mar 02. 2022

[한쪽 소설] 울보들아 들어라-16

마키아벨리가 고(告)함

이제 피렌체 역사상 가장 극적인 하루였던 1478년 4월 26일 부활절 이야기를 해보겠다.

오후 3시 두오모에서는 부활절 미사가 한창이었다. 신부가 성체 의식을 위해 빵을 높이 들었을 때, 갑자기  "내 칼을 받아라, 반역자여!"라고 고함을 지르며 로렌초와 줄리아노에게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메디치 암살의 실행을 맡았던 베르나르도 바론첼리와 프란체스코 데 파치였다. 프란체스코는 그의 친구였던 줄리아노에게 날카로운 단검을 휘둘렀다. 불쌍한 줄리아노는 누가 자신을 해하는지 깨닫기도 전에 열아홉 군데를 찔리고 쓰러졌다. 로렌초로 향했던 베르나르도의 칼날은 미숙하였다. 그는 노련한 암살자가 아닌 수사(修師)였기 때문이다. 로렌초는 갑자기 날아든 단검을 오른쪽 귀 밑으로 흘렸다. 그리고 다음 번 공격이 이어지기 전, 놀란 군중들 틈을 제치고 성물 보관소로 도망가 문을 틀어 잠궜다.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었다. 암살자들은 로렌초를 보호하려는 호위 무사들에게 제지당하여 더 이상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그렇게 로렌초 형제에 대한 암살 시도는 줄리아노 한 사람을 살해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것은 오히려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피흘리는 동생을 내려다보게 된 로렌초는 격분하였다.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초상. 


부활절의 성스러운 분위기는 깨졌다. 피렌체 시내는 아수라장이었다. 파치 가문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포폴로, 리베르타(인민들이여, 자유를)!"를 외치며 피렌체 시민들을 선동하였다. 메디치가의 압제를 거부하고 분연히 일어나 시민의 불가침 권리인 자유를 찾으라고 호소하였다. 하지만 거리에 나온 피렌체 시민들 대부분은 그들이 자유을 잃었다고도, 로렌초를 독재자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포폴로, 리베르타!"의 외침은 "팔레!팔레!"라는 구호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메디치 가문의 문장에는 여섯 개의 둥근 공이 달려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메디치가를, 공을 뜻하는 '팔레'라는 애칭으로도 불렀다. 그들이 외치는 "팔레!"란 구호는 여전히 메디치 가문을 지지한다는 뜻이었다. 시민들은 파치가를 찬동하지 않고 암살에서 살아남은 로렌초를 따르겠다는 뜻을 확실히 한 것이다. 군중들 속으로 누군가 줄리아노가 미사 중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메디치가를 사랑했던 시민들은 분노하였다. 앳된 젊은이를 잔인하게 죽인 암살단원들에 대한 피의 보복을 외치는 소리가 광장을 덮었다.  

메디치가의 문장. 여섯 개의 공이 달려 있어서 '팔레'라는 애칭으로도 불렸습니다.

암살에 가담한 파치 일당은 변명할 틈도 없이 광분한 시민들에게 한 사람씩 차례차례 사로잡혀 사형당한다. 암살 과정 중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리던 프란체스코 데 파치는 그의 집으로 도망쳤다가 붙들려 팔라초 베키오로 끌려 나왔다. 거기서 바로 광장을 향한 정청 창문에 목이 매달렸다. 그 옆에서 바로 다음 목이 매달리게 된 살비아티 대주교는, 시인 폴리치아노의 증언에 따르면 이런 사태의 발단이 된 프란체스코를 저주해대더니 죽어가는 순간 옆에 달린 그의 발을 꽉 깨물었다는 해괴한 이야기도 들린다. 

로렌초의 암살에 실패한 베르나르도 바론첼리의 운명도 비슷했다. 그도 손이 뒤로 묶인 채 교수형을 당했다. 군중 사이에는 그 장면을 묵묵히 바라보는 스물 여섯살의 젊은 화가가 있었다. 너희들의 시대에 사진 기자가 사건 현장을 사진기로 찍듯 그는 그 처참한 역사적 장면을 스케치로 남겼다. 그의 이름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교수형 당한 베르나르도 바론첼리. 레오나르도도 이 사건을 목격했나봐요.

로렌초는 암살의 위기를 모면하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가벼운 상처를 감싸기 위해 목에 붕대를 두르고 메디치 궁의 창가에 모습을 나타냈다. 시민들은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이렇게 1478년 부활절의 광란은 마무리된다.


이번만큼은 로렌초도 그의 아버지처럼 배신자들에 대해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파치 가문은 자코모를 비롯해 부녀자를 제외한 전원이 체포되었으며, 거의 모두가 사형에 처해졌다. 피렌체 시내에 파치가의 문장 등 그들을 상징하는 것은 모두 제거되었으며 파치 궁도 초석까지 철저히 파괴되었다. 지금도 그들의 저택이 어디 있었는지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 파치가는 그렇게 피렌체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4일 후에는 줄리아노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런데 그는 죽기 며칠 전, 그의 애인으로부터 남자 아이를 낳게 된다. 로렌초는 아끼던 동생을 위해 그 아이를 메디치가의 자손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로렌체가 공들여 키운 이 아이는 자라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된다.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었다.

(계속)


*파치가의 음모에 대해서는 시오노 나나미의 책,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중 '파치가의 음모' 장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그 긴박한 상황들이 시오나 나나미의 입담과 다소 강박적인 자료들이 가미되어 매우 재미있고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읽어보시면 꽤 재미있을 거예요. 제가 쓴 글은 그것을 많이 요약한 것인데다가, 여러 자료에서 찾은 것들을 덧붙인 것이라 약간 다르게 느껴지실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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