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를 찾아서' 되살리기 프로젝트
제가 앞선 글에서 영지주의에 대해 다시 설명드린다고 했는데요, 이제 그럴 순서가 되었네요.
초기 기독교 역사를 이끈 것은 이제껏 우리가 현재 믿고 있는 기독교와 동일한 종교의 성자와 순교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무수히 이질적인 집단들이 다양한 교리와 철학을 주장하며 혼재하였습니다. 이 집단들은 크게 두 유파로 나뉩니다. 먼저 문자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예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 기독교 파는 서기 4세기 초까지 주류로 떠올랐으며 결과적으로 로마제국에 수용되어 로마 가톨릭교가 되었고, 이후 많은 분파를 낳았습니다. 즉,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정통 기독교를 말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초기에 예수를 따른 무리 가운데에는 비단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믿는 것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특별히 목격'했거나 그 계시를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집단이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이러한 경험, 혹은 영지를 통해 그리스도의 참된 신도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할 수 있다고 설교했습니다. 스티븐 휠러(Stephan Hoeller)의 설명에 따르면 이 기독교인들은 "인간은 직접적이고, 개인적이며, 절대적으로 존재의 참된 진리에 도달할 수 있고 나아가 그 같은 깨달음을 얻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성취가 틀림없다는 확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그노시스(gnosis) 학파, 즉 영지주의자(靈知主義者)라 불렀는데요, 자기를 아는 것이 곧 인간의 본성을 알고 운명을 아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를 알기'위해 신비주의와 우주론적인 의미의 심오한 지식을 추구했으며, 그 바탕으로 기독교와 고대 그리스, 이집트, 신비주의, 심지어 동양에서 전래된 철학까지도 폭넓게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영지주의자들은 매우 박식해졌고, 그리스와 유대 랍비의 전통을 이어받아 학파를 형성하여 지식을 나누고 토론하는 것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영지를 체험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영적 수련의 궁극적인 목표로, 단순히 지각이나 종교적 교리 너머의 실체로서의 신, 무한, 또는 절대적인 것과의 합일을 추구합니다. 신과의 합일, 즉 스스로 그리스도가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어디서 본 듯 하지요? 그렇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성찰하여 부처와 같은 존재인 아라한(나한)이 될 수 있다는 사상, 즉 동양의 소승불교(小乘佛敎, 요즘은 상좌부(上座部) 불교라고 합니다.)와 흡사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영지주의자들이 이교도의 철학과 사상을 스펀지처럼 흡수하여 통합하는 과정에 섞여 들어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만 봐도 왠지 문자주의자들과 영지주의자들 간에는 갈등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사실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영지주의의 신앙과 실천은 문자주의자들이 보기에는 이단 내지 이교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교도 철학자들처럼 환생을 믿었고, 이교에서 흔히 보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서의 여신인 소피아를 숭배했으며, 플라톤의 신비주의 그리스 철학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특히 로마 가톨릭과는 다르게 예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더군다나 그를 신과 동일한 존재로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영지주의는 짧게나마 기독교의 주류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그 증거로 영지주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제 가운데 한 명인 발렌티누스가 2세기 중엽 로마 주교의 물망에 올랐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서기 100년 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발렌티누스는 높은 수준을 자랑했던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공동체에서 비범한 지도자로 일찍이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중년에 접어들면서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교회의 수도이자 한창 발전 중이던 로마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교회와 관련된 공무를 보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말씀드린 바대로 2세기 중엽, 한때 로마 교회의 실력자로 인정받기도 했지만 말년에는 대중의 관심에서 밀려나며, 정통 기독교로부터 이단자라는 낙인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대략 2세기 중반부터 기독교의 흐름이 영지주의로부터 등을 돌리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발렌티누스 이후로는 어떤 영지주의자도 주류 교회에 뚜렷이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영지주의가 쇠퇴하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지나치게 개인적인 경험을 강조하였다는 점, 끊임없이 쏟아지는 계시와 새로운 성서들의 저술로 인해 신뢰성을 상실했다는 점, 금욕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사제나 신도들이 방탕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결국 서기 180년경 리옹의 주교 이레나이우스는 최초로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공격하는 글을 발표합니다.
그러나 욕하면서 닮는다고 정통 기독교는 2, 3세기에 영지주의와 투쟁하며 이들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기독교 신학의 핵심 전통들이 영지주의의 것을 반영하여 형성되기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대결은 4세기 말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는데요, 제1 차 니케아 공의회(325) 이후 정통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 영지주의자들이 절대적인 이단으로 몰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전통으로서 영지주의는 거의 뿌리가 뽑혔고, 남은 지도자들은 추방당했으며, 이들이 남겼던 성서도 철저히 불태워졌습니다. 영지주의를 연구하려는 후대 학자들이 그 자료를 찾아보려고 해도 남은 것이라고는 정통 기독교 교부들의 이단 연구 저술 안에 나타난 비난과 단편적인 기록들 뿐일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반전이 있었습니다. 1945년 12월 모하메드 알리 알 삼만이라는 한 아랍 농부가 이집트 나그함마디 근처의 동굴에서 놀라운 발굴을 합니다. 커다란 바위 주변을 파던 그는 높이가 거의 1미터에 이르는 붉은 토기 단지를 발견했는데 이 단지 안에서 가죽으로 장정된, 열세 권의 양피지 책과 낱장들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발견된 곳의 이름을 따 나그함마디 문서(Nag Hammadi library)라고 불리게 되었는데요, 숨겨져 있던 영지주의 문서들이었습니다. 그동안 신약 성서에서 고의적으로 배제되었으나 초기 기독교인 사이에서 널리 읽혔던 문서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정말 흥분되는 사건이지요? 과연 그 안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요?
(계속)
# 참고자료:
1. 최후의 만찬(레오나르도 다빈치). 하이덴라이히 지음/최승규 옮김/한명/2000년 12월
2. 다 빈치와 최후의 만찬. 로스 킹 지음/황근하 옮김/세미콜론/2014년 05월
3. 다 빈치 코드. 댄 브라운 지음/양선아 옮김/베텔스만/2004년 07월
4. 다 빈치 코드의 비밀. 댄 버스틴 엮음/곽재은, 권영주 옮김/루비박스/2005년 3월
5.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다빈치 코드의 비밀). 마가렛 스타버드 지음/임경아 옮김/2004년 08월
6. 서양 미술사. E. H. 곰브리치 지음/백승길, 이종승 옮김/도서출판 예경/1997년 5월
7. 세계명화비밀. 모니카 봄 두첸 지음/김현우 옮김/생각의 나무/2002년 4월
8.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재원아트북 편집부 지음/재원/2004년 09월
9. 레오나르도 다 빈치. 프랑크 죌너 지음/최재혁 옮김/마로니에북스/2006년 11월 9
10. 레오나르도 다 빈치: 르네상스의 천재. 프란체스카 데블리니 지음/한성경 옮김/마로니에북스/2008년 0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