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어린 날
그렇게 중학교에 올라갔어요. 별로 달라진 건 없었죠. 나는 여전히 혼자였어요. 혼자 학교에 가고, 혼자 공부하고, 혼자 급식을 먹고, 혼자 집에 돌아왔죠. 가끔 말을 거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깊이 사귀지는 못했어요. 누군가를 사귀는 방법을 잘 몰랐거든요. 그 친구들이 먼저 다가왔다가 재미없어서 쓸쓸히 떠나가는 느낌이었어요. 그래도 뭐 그렇게 외롭지는 않았어요. 혼자서 책 읽는 것을 좋아했거든요. 쉬는 시간에도, 남는 점심시간에도 책을 읽었어요. 집에 와서는 밤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손에 닿는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나는 그림 없는 책을 좋아해요. 그림 없는 책을 읽으면 오히려 등장 인물의 모습부터 글 속의 장면까지 내가 전부 머릿속에 만들어 낼 수 있거든요. 주인공의 얼굴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어 결국은 내 이상형이 되어 갔고요. 그가 사는 커다란 궁전도, 또는 바다 위를 미끄러져 가는 범선도, 별사이를 날아다니는 우주선도, 모두 세세한 데까지 내가 원하는대로 꾸밀 수 있었어요. 아무것도 없는 흰 도화지에 내 마음대로 점을 찍고, 선을 그려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았어요. 김빠지게 중간에 삽화가 끼어들어 있으면 왠지 상상은 그 그림에서부터만 시작되는 거예요. 바꾸기 힘든 선입견이 생겨버리는 거죠. 그러면 책의 재미가 반감되요. 그런 거 선생님도 동감하시죠?
고등학교 올라가서는 대학가기 위한 공부만 했어요. 같이 다니는 친구가 두세 명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 가깝지는 않았어요. 나는 그냥 그네들 얘기 들어주는 게 좋았을 뿐이에요. 입은 닫고, 귀만 열어 둔 친구를 여자아이들은 좋아해요. 아무래도 그네들은 남의 얘기를 듣기보다는 자기 얘기를 쏟아내는 데에 더 관심이 많았거든요.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어요. 나는 해줄 말은 없었지만 들어줄 말은 많았으니까요. 교과서와 참고서만 파야 하는 그 시기에 책 읽는 것을 대신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었어요. 얘기를 들으면서 또 상상의 나래를 펼쳤죠. 나는 그 친구들이 되고, 그들의 집에 살고, 그들의 고민에 울고, 사소한 행복에 웃음짓기도 했어요. 물론 그들의 얘기 속에도 삽화는 없었어요. 내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그림을 채워 넣었어요. 그정도 친구들이 있는 것은 공부에 전혀 방해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고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어요. 네, 그래요. 한국대학교 약학과요. 글쎄, 기대했던 것보다 성적이 좋았어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대학이잖아요.
내가 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느낀 건 대학 들어가서였어요. 대학 입학식을 마치고 나니 학교 안에는 내가 아는 사람도, 나를 아는 사람도 없는 거예요. 내가 소심하고 말수가 적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그리고 그것을 모르는 남들에게 고자질할 사람도 말이지요. 나에 대한 사람들의 선입견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였죠. 그만큼 내가 나를 바라보는 선입견도 희미해졌어요. 흰 도화지에 내가 원하는 새로운 그림을 그려넣을 좋은 기회가 온 거예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