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등장
그 녀석이 깨어난 건 신입생 환영식이었어요. 말이 환영식이지 후배들을 몰아놓고 선배들이 무서운 척하며 억지로 술 마시게 하는 그런 자리였어요. 몇몇 선배들의 무게 얹힌 자기소개와 학교생활에 대한 안내를 들었어요. 그렇게 조성된 분위기 속에서 모든 신입생의 앞에는 소주가 가득 찬 잔이 3개씩 놓이게 되었어요. 생전 처음으로 나를 위해 따라진 소주잔을 마주했어요. 예전에 아버지가 한두 잔 드시는 것은 보았지만 절대로 나한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생각했거든요. 우리 집은 원래 술을 잘 못 해요. 아버지는 소주 한두 잔이면 얼굴에서 피가 나는 거 아닌가 할 정도로 빨개지세요. 어머니는 맥주 한 잔 드시면 가슴이 두근거려 응급실 가셔야 하고요. 그런 집안에서 자란 내가 나를 위한 소주잔을, 그것도 석 잔씩이나 마주하고 있다니. 그냥 신기할 뿐이었지요. 마시려면 마실 수도 있겠거니 했어요. 설마 죽기야 하겠나 싶었죠. 그것보다는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공포 분위기가 내가 가진 삶의 애착보다 더 강하게 나를 짓눌렀다고 하는게 맞는 것 같아요.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어요. 소주 석 잔을 연거푸 마시고 자기소개를 하라는 거예요. 나는 벌떡 일어나서 우선 한 잔을 들이켰어요. 생전 처음 마셔보는 소주였어요.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죠. 달달하면서도 쓴 냄새가 조금 역했어요. 뜨거운 액체가 내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지요. 배 안이 뜨끈해지면서 갑자기 나는 내 안의 무엇인가가 부스스 눈을 뜨는 것을 느꼈어요. 갓난아이가 눈을 뜨듯이 말이죠. 그리고 한 잔을 더 들이켰어요. 그 녀석이 번쩍 눈을 떴어요. 석 잔째에는 천천히 기지개를 켰지요. 그리고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내 입을 통해 그 녀석의 외침을 대신 전했을 뿐이에요.
“안녕하십니까, 약학과 11학번 지도희입니다. 선배님들, 동기 학우 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저는 대전 제일여고를 졸업했습니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적어서 우리 학교에서 유일하게 저만 한국대학교에 합격했습니다. 그동안 동경하던 교수님들과 선배님들을 만나 뵈려고, 이렇게 약학과에 지원하여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네? 취미요? 취미는 독서이고, 특기요? 특기는 할 줄 아는 게 없습니다. 보여드릴 게 없어서 그냥 아는 노래나 한 곡 불러드리겠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어요. 누가 뭘 보여 달라고도 안 했고요. 그 녀석 혼자 신이 났던 거예요. 노래의 시작이 조용하더군요 “쉬즈 곤, 아웃 어브 마이 라이프, 아임 롱…” 스틸 하트의 ‘쉬즈 곤’이었어요. 갑자기 좌중도 함께 조용해졌어요. 저 구석에서 자기네들끼리 떠들던 사람들까지 모두 돌아봤어요. 나도 놀랐어요. 나도 내가 그 가사를 외우고 있는 줄 몰랐거든요. 조용하게 시작하지만 결코 조용하게 끝날 수 없는 노래예요. 결말이 두 가지밖에 없는 노래, 모 아니면 도죠. 이 노래 부르려면 3옥타브 솔까지 올라가야 해요. 아무리 내가 여자라고 하더라도 그건 무리죠. 결론은 보나 마나 모가 아닌 도였죠. 거기다가 여자인 내가 난데없이 왜, 가버린 그도 아니고, 그녀를 그리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도 몰랐어요. 또 이 노래가 왜 남자들이 노래방에서 부르다 가장 낭패 보기 쉬운 노래인지, 여자들이 노래방에서 가장 듣기 싫어하는 노래인지도 전혀 몰랐어요. 노래는 절정부로 향하고 있었어요. “포기브 미, 거~어~어~얼, 레이디~…” 거기서부터 익룡의 울음소리가 시작되었던 것 같아요. 맞아요, 쥐라기때 하늘을 날던 공룡 말이에요. 막 먹잇감을 발견하고 동료를 부르는 소리 같았어요. 아니 노래를 하고 있는 내가 들어도 그게 틀림없었어요. 환영식장은 일순간에 뒤집어졌어요. 남자고 여자고, 선배고, 동기고 가리지 않고 웃느라고 정신이 없었어요. 마시던 소주를 찌개 그릇에 뱉어 버린 사람도 있었고, 뒤로 고개를 젖히고 웃다가 뒤통수를 벽에 부딪혀 그대로 누워버린 사람도 있었어요. 익룡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울부짖었어요. 내 잘못은 아니에요. 나는 그냥 그 녀석이 부르는 노래를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던 것뿐이에요. 어떻게 노래를 마쳤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모든 사람들의 격렬한 환호 속에서 나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따라주는 술잔을 마시고 또 마셨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 떠들고 또 떠들었어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