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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벽돌 Jun 29. 2022

파란 벽돌-2

나의 특별함에 감사함

나의 집은 당시 다른 집들과 구별되는 아주 특별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외벽의 전면이 파란 벽돌로 뒤덮여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까칠까칠한 외면이 아닌 에나멜 같은 마감재로 처리된 반질반질한 벽돌들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나의 집 외에 어떠한 곳에서도 파란 벽돌로 마무리된 건물을 본 적이 없었다. 주변에 흔한 것은 까칠까칠한 표면을 가진 붉은색 벽돌집들뿐이었다. 붉은색 벽돌은 작은 충격에도 잘 부스러졌으며 길거리에서도 그 조각들을 쉽게 찾을 수 있어 소꿉놀이를 할 때 잘 사용되었다. 잘게 으깨어 소꿉놀이 쟁반에 담아놓으면 영락없이 고춧가루가 많이 섞인 찌개나 볶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파란 벽돌들은 특이한 구조를 가진 나의 집을 빌로드처럼 덮어 실제 크기보다 더 웅장해 보이게 만들었다. 게다가 나의 집은 높다란 언덕 위에 얹혀 있었다. 물론 언덕 위에는 여러 채의 집들이 있었으나 붉은 벽돌집들 사이에 파란빛으로 삐져나온 나의 집은 그 색깔과 생김새가 대비되어 언덕 밑에서 바라보는 동네 사람들에게 매우 신기하게 비쳤을 것이다. 그렇다고 집값이 비쌌던 것은 아니었다.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내려야 하는 언덕 위의 집들은 다니기 어려운 만큼 경제적 가치는 떨어졌다. 


파란 벽돌만큼이나 특이한 것은 또 있었다. 나의 집은 어울리지 않게 큰 대문과 차고 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두꺼운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나무 대문에도 니스가 반들반들 잘 칠해져 해가 뜰 때쯤이면 파란 벽돌과 나무 대문에서 반사되는 햇빛이 잠시 눈을 부시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래서 우리 집은 '파란 벽돌에 노란 나무 대문 집'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이러한 별칭은 때로 우리 가족들에게 매우 편리하게 사용되기도 했는데 누군가 우리 집을 찾아오려는 사람들에게 대충의 주소를 알려주고 그 근방에서 '파란 벽돌에 노란 나무 대문 집'을 물어보라고 하면 대부분이 큰 어려움 없이 찾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근처 중국집에 자장면을 주문할 때에도 다른 언급 없이 '파란 벽돌에 노란 나무 대문 집'으로 배달해 달라고 하면 찰떡같이 잘 알아들을 정도였다. 나는 그 집에서 나의 유년, 소년 시절의 전부를 보냈다. 그래서 나는 동네에서 아무개, 혹은 아무개의 아들이 아닌 '파란 벽돌집 큰 아들내미'로 더 흔하게 불리었다. 


나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집을 손수 설계하여 짓기를 원하였다. 조그만 한옥집에 살며 착실히 돈을 모아 자신만의 집을 꾸미고자 꿈꾸었다. 어렵게 마련된 돈으로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던 서대문구 홍제동 어느 언덕 위의 널찍한 땅을 겨우 마련하였다. 바쁜 틈을 쪼개 설계사무소를 들락거리며 설계사들을 닦달하여 자신의 희망이 듬뿍 반영된 주택의 설계도를 완성하였다. 얼마간의 돈이 더 모이자 건축사를 고용하여 뚝딱뚝딱 건물을 올렸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언덕 위의 파란 벽돌집이었다. 그 집은 지어지기 전까지는 아버지의 소망이었고 완성되고 나서는 훈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오래된 훈장에 입김을 불어 닦듯이 그 집을 돌보는 데에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집 안도 역시 다른 집과 달랐다. 정원과 통한 큼지막한 거실의 벽은 벽지 대신 원목 무늬를 머금은 나무 패널로 덮여 있었고 바닥에는 붉은색 카펫이 깔려 있었다. 한 칸 건너 서재는 대조적으로 파란색 카펫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 방들에는 모서리를 돌아 원목으로 특수 제작한 벤치 모양의 노란 장의자가 화분 받이용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당시로서는 특이하다 못해 전위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자주 들르시는 차고 위 장독대에는 붉은 타일이 깔려 있었다. 종합하자면 외부에서 보기에는 단색의 네모난 파란 벽돌집으로 보였지만 대문을 마주하고 들어서면 파랑, 빨강, 노랑이 뒤섞여 배치된 매우 현란한 색감을 가진 독특한 구조의 집이었던 셈이다.


나의 집을 방문한 사람들은 모두 그 특이함에 놀라는 눈치였다.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지의 미적 감각을 칭찬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여러 방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로 만든 장의자가 너무 부럽다면서 만들어줄 만한 곳을 물어보거나 그러기 어렵다면 하나 달라고 애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릴 적 나는 정작 나의 집이 그렇게 유별나게 느껴지지 않았다. 기억이 남아있을 만큼 어린 시절부터 그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저 익숙한 공간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의 집은 매우 창의적이었고 나의 아버지는 무척 유별난 분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나는 그 특별한 공간을 낯설게 느끼지 않았다. 그저 나의 집이 다른 집에 비해 남달랐다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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