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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벽돌 Jul 18. 2022

인간은 왜 이 따위로 생긴 것일까?-1

1. 인간은 정말 아름다운가?

때로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인간은 도대체 왜 이렇게 생겨먹은 것인가?’ 

이번 생애에서는 누가 봐도 그리 아름다운 외모로 태어나지 못한 나는 항상 나의 생김새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내 키는 왜 이리 작고, 팔다리는 짧고 굵을까? 몸이 그렇다면 얼굴이라도 잘 생겨야 할 텐데 그것도 아니다. 눈, 코, 입 하나하나 뜯어보면 참 예쁘고 볼만한데 그것이 다 모여있으면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개인 성적이 뛰어난 프로 선수들을 모아 올스타팀을 만들어 놓았더니 손발이 맞지 않아 연습 경기에서 까까머리 고등학교 팀에 대패당하는 기분이랄까? 뭐, 이런 변명도 사실 과장이 섞인 것일지도 모른다. 뜯어보면 예쁘다는 말은 그저 어디선가 한 두 번 들어본 것이고 그런 평가를 해준 사람들이 정말 내 눈, 코, 입을 마음에 들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답답한 내 외모가 안타까워 위로해주려 그랬는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스스로를 아끼고자 하는 나의 본능이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하며 그것을 전자의 의미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눈, 코, 입만 잘생기면 뭐하나?

혼자만 못생기기가 억울했던 것일까? 자신의 외모에 만족을 느끼지 못했던 나는 개인적인 불만을 인간 전체로 확대시키기 시작했다. 나와 유사하게 생기고도 아름답다고 추앙받는 인간들은 정말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인가 하는 비뚤어진 질투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한 인간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인체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저한 분석과 그에 파생된 끝도 없는 호기심으로 번져갔다.  


인간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꼼꼼히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만약 그런 경험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그중 다수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아름답다고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 인체는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떠한 황금비의 조화도 갖추고 있지 않다. 눈이 달린 여러 생명체들의 시선을 집중시킬 화려한 색상을 띠고 있지도 않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얼굴과 몸을 아름답다고 칭찬하고 심지어는 그것을 기리기 위해 여러 가지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기까지 한다. 아무리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이 당연하다 해도 참으로 뻔뻔하고 이기적인 행위이다. 나는 일찍이 그것을 간파하였다.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차이로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나 자신이 억울해서 인류 전체를 끌어안고 함께 가라앉으려는 물귀신 작전을 쓰려고 했다. 그 사전 작업으로 나는 인체를 차근차근 분석해 보려고 했다. 정말로 그것이 조화로운 미를 갖추고 있는지 말이다. 다행히 나는 그럴 기회를 많이 접할 수 있는 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의과대학 학생 때부터 현재까지 그것은 나에게 계속되는 숙제와 같은 작업이었다.


우선 사람의 몸을 멀리서 바라보자. 그것이 전체의 균형을 파악하기에 좋은 방법이다. 사람 몸의 중심은 누가 봐도 뭉툭한 몸통이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직사각형 혹은 뒤집어진 사다리꼴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상하게도 앞뒤의 두께가 상하좌우의 너비보다 얇은 샌드위치 모양이다. 차라리 공 모양으로 생겼다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다. 원형은 자연의 형태 중 가장 대칭적이고 완벽한 구조이기도 할뿐더러 만약 몸이 원형이라면 급할 때 팔다리를 접고 빠르게 굴러다니기에도 편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이렇게 생뚱맞고 비효율적인 몸통에는 어울리지 않는 기다란 다리가(비록 나 같은 사람은 그리 길지 않지만) 달려 있다. 다리는 몸통을 지면과 분리하여 지탱하고 혹은 원하는 자리로 옮겨다 놓는 역할도 하고 있다. 양다리의 부지런한 교차로 이동하는 것은 참으로 고단한 작업이다. 그래서 다리의 끝에 달린 발은 흉하고 둔하게 생겼다. 땅의 오물을 딛고 서야 하기 때문에 불결하기까지 하다.


 몸통의 가운데도 아닌 위쯤에서는 볼품없는 팔이 삐죽이 뻗어 나와 허우적거리고 있다. 팔은 어깨와 팔꿈치 관절을 통해 그 길이가 허용하는 한 어느 곳이든 도달할 수 있다. 팔이 이렇게  필사적으로 활동 반경을 유지하려 하는 데에는 그 목적이 분명히 있는데 그것은 그 끝에 달린 손을 원하는 곳에 위치시키려 함이다. 이 손이라는 것은 갈고리가 여러 개 붙어있는 것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반쪽만 달린 문어발처럼 생겼다. 팔의 맨 끝에 매달려 온갖 복잡한 움직임을 만들어내어 목적하고자 하는 동작을 완성한다. 앞서 말했듯이 이 가느다랗고 잔망스러운 구조물은 결코 아름답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몸통의 양쪽에 달린  팔과 다리 즉, 네 개의 사지는 그 개수는 다르나 사람을 마치 거미처럼 보이게 한다. 퉁퉁한 몸통에 비해 팔다리의 굵기가 눈에 띄게 가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인체는 그리 봐줄 만하지 않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비투르비우스의 인체 비례도


무엇보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그 몸통과 사지의 맨 꼭대기에 붙어있는 머리통이다. 이것은 저마다 약간 차이 나기는 하나 보통 배구공정도 되는 크기로 외형은 둥글둥글하다. 마주 보는 앞과 양 옆에는 서로 다른 모양을 갖는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그 구멍들이 생김새만큼이나 서로 다른 각자의 역할을 하며 보고 듣고 숨 쉬고 맛보는 기능들을 한다. 정말로 시답지 않게 때로는 이것들이 자신이 느끼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표현하는 표정을 만들어 낸다. 머리통 위에는 정말 우스꽝스럽게 기다란 털이 자라고 있다. 마치 땅에 파묻힌 무 위로 자라나는 무청과도 같은 모양이다. 그 같잖은 무청의 개수와 형태가 사람들에게는 무척 고민거리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털이 조금 부족하거나 없다고 다른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좌절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 무청의 모양을 다듬으려 상당한 시간과 돈을 할애한다. 참으로 의미 없고 가련한 행위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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