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홀로 서기
저는 그로부터 2년여간을 좌절했어요. 선생님은 경험해보신 적 없으시죠? 내일의 희망이 없는 막막한 나락의 시간을요. 나의 행동은 잘못되지 않았지만, 나의 선택이 잘못되었던 거예요. 아니 선택도 잘못된 것은 아니었죠. 조금 남달랐던 것뿐이예요. 타협보다는 본능에 따랐다는 것이죠. 선 교수가 본능에 따른 것은 잘못이었지만, 내가 본능에 따른 것은 잘못이 아니잖아요. 선택의 결과라고 하기에는 그 대가가 너무 가혹했어요. 나는 그동안 미스 하이드를 잊고 살았어요. 그 녀석의 물불 안 가리는 성격 때문에 일이 이렇게 꼬여버린 것이니까요. 그 녀석이 조금만 생각을 할 줄 알고, 조금만 참을성이 있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승승장구하고 있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그래서 다시는 그 녀석을 마주하기 싫었지요.
그러다가 백수 생활 3년째에 어렵사리 일산제약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그전에 이름은 들어보셨나요? 아마 못 들어 보셨을 거예요. 우리나라에서는 중소규모의 그렇고 그런 회사예요. 어떤 제품이 나오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죠. 선 교수의 방해 공작도 그런 작고 보잘것 없는 회사에까지는 미치지 못했었나 봐요. 사장님은 나의 뛰어난 성적에 관심을 보였어요. 하지만 숫기 없는 성격 때문에 주저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할 수 없이 오랜만에 미진이 흉내를 좀 내봤죠. 겨우 합격이 된 것 같아요. 나는 남자들도 힘들어한다는 세일즈 파트로 지원해 들어갔어요. 그동안 쌓인 한이 있었다고나 할까요. 조용한 곳에 처박혀 시간을 때우기 보다는 좀 더 과감하게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그동안 미스 하이드를 통해 그런 것들이 주는 성취감을 배우고 맛본 경험이 있었거든요. 과정이 고통스럽기는 하더라도 열매가 너무 달콤하지요. 미스 하이드 덕분에 그런 쾌감에 익숙해져 있었던 나는 이미 평탄한 삶에 만족할 수 없었나 봐요.
미스 하이드의 도움 없이도 나는 그럭저럭 잘해나갔어요. 원래 이 바닥의 세일즈라는 게 아시다시피 무작정 부딪치는 게 최고죠. 머리를 디밀고 자기를 어필하고, 자기 회사와 제품을 알리고, 그것을 처방하도록 유도하는…. 마치 보험을 판매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까요. 그러려면 고객의 닫히려는 문틈으로 발부터 들이미는 게 우선이에요. 그래서 자기만의 방법을 쓰는 것이지요. 회식을 마련해서 친해지는 기회를 갖기도 하고, 작은 선물을 준비하기도 하고. 의사들의 방문은 웬만해서는 잘 열리지도 않는 데다가, 열렸더라도 금방 닫히려 하거든요. 여직원은 그런 면에서 불리하지요. 남자 의사도, 여자 의사도 모두 떨떠름하게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나는 지도희만의 방식을 개발했어요. 우선 사람에 대한 연구이지요. 고객을 철저히 연구해서 나와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부분을 찾고, 고객이 가장 원하는 것을 파악하여, 그것을 색다른 방식으로 만족스럽게 해결해주는. 그것이 책을 읽고 분석하고, 상상력을 펼칠 줄 알았던 나에게 어울리는 방식이거든요. 눈을 감고 생각해봐요. 고객이 원하는 것을. 흰 도화지에 그것을 그리다 보면 빈 곳에 채워야 하는 것들이 반드시 있거든요. 나는 그런 것들을 대신 채워주는 것이죠. 만약 원하는 게 없다면? 그것도 걱정 안 해요. 내가 처음부터 대신 그려줄 수도 있어요. 가령 예를 들면 이래요. 어떤 의사의 취미가 바다낚시라는 것을 알아냈다 쳐요. 그렇다면 그는 틀림없이 요트에도 관심을 가지기가 쉽죠. 바다낚시의 끝은 자신의 요트를 직접 몰고 가 바다 한가운데에 세워놓고 친구들과 여유 있게 고기를 낚아 올리는 것 아니겠어요. 물론 그가 아직 초보 낚시꾼이라서 요트에 관심이 없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관심은 내가 만들어 줄 수도 있지요. 바다낚시에 관한 대화로 흥미를 돋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요트에 대한 꿈을 심어주는 것이죠. 멋진 요트가 떠 있는 사진 같은 것으로 말이죠. 그 다음엔 요트에 관한 책이나 요트 동호회를 알아봐 주고 마지막에는 근사한 요트 모형을 사다 방에 전시해 주는 거예요. 그가 매일 그것을 보며 요트의 꿈을 잃지 않게 말이죠. 그러면 그는 계속해서 나를 찾을 수밖에 없어요. 나를 찾기 위해서 우리 회사 제품을 쓰지 않을 수 없고요. 이건 노력과 정성이 드는 방법이지만 효과도 꽤 있어요. 누구도 해보지 않았던 방법이거든요.
나는 점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어요. 내 실적은 남자 직원들을 누르고 늘 1, 2위를 다퉜죠. 우리 회사 제품들이 품질은 내세울 게 없었지만, 걸출한 세일즈 직원, 지도희의 마케팅 작업이 들어가면 쓰지 말래도 우리 회사 약만 썼어요. 3년 만에 과장이 되었어요. 초고속 승진이었죠. 성과급으로 늘어난 연봉은 시간이 없어 다 못 쓸 정도였어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