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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범한지혜 Sep 22. 2020

밥심

오늘은 유난히 지치는 날이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옷을 벗어던지고,

그대로 드러눕고 싶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냄비 두 개에 가지런히 물을 올린다.


하나는 국수를 삶을 냄비,

다른 하나는 잔치국수 육수를 만들 냄비이다.


원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잔치국수는

굵은 멸치와 다시마로 우려낸 육수에

진간장과 액젓으로 간을 해서 국물을 만들고,

살캉하게 볶은 애호박에다 달걀지단, 신 김치 볶음, 김가루를 올리고, 잔파를 듬뿍 썰어 넣은 양념장을

중간중간 보충해가며 먹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오늘은 응급상황이다.

이것저것 다 갖출 겨를이 없다.

일단 냄비 두 개에 물을 올리고

냉장고를 열어 있는 재료를 파악한다.

달걀, 덜 쉰 김치, 도시락 김이 보인다.


멸치와 다시마가 보이지만 육수를 우려낼 시간이 없다. 다시다 조미료 한 스푼으로 대체하고

진간장과 액젓으로 간을 해서 국물을 만든다.


달걀로 지단을 부쳐 썰어내는 것도 오늘 같은 날은 사치다. 그냥 달걀을 풀어 끓는 육수에 붓는다.

육수는 불을 줄여 조금 더 끓도록 두고,

김치는 가위로 대충 썰어 참기름을 조금 넣고

전자레인지에 2분 돌린다.

양념장도 집에 있는 걸로, 진간장에다 고춧가루,

깨소금, 참기름, 냉동실에 있던 얼린 마늘 다진 것과 얼린 대파 조금 부숴 넣는다.


이러는 사이 국수 삶을 물이 끓는다.

손으로 국수 한 줌을 집어 물에 넣고,

망설이다 결국 그만큼의 반을 더 집어 물에 넣는다.

뽀얗게 국수가 끓으며 떠오른다. 찬물을 한번, 두 번 끼얹고 다시 한 번 부르르 끓어오르면 불을 끈다.

찬물에 국수를 북북 문질러 씻고, 물기를 쭉 짜서

국수 그릇에 동그랗게 담는다.


끓고 있던 계란 국물을 붓고 데운 김치를 올리고

도시락 김을 부숴 국수를 완성한다.

이 모든 과정이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후루룩 거리며 국물을 마시고 부드러운 소면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몇 젓가락 먹지 않아 배가 조금씩 차오르고

또 국수를 많이 삶았음을 깨닫는다.


‘나는 이런 날은 꼭 국수를 많이 삶더라.’



국수의 양 그만큼 내 마음을 푸근하게 하고 싶은 때문이었겠지.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은 날.

결국 문제는 해결도 못하고 그만 지쳐버려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만 싶은 날.


어떤 날은 동료들과 치맥 한 잔 하며

누구 뒷담화라도 하며 풀어버릴 수도 있지만

이것도 그나마의 체력이 남아 있을 때의 이야기다.


체력이 완전히 바닥나는 날은

목구멍과 배 속이 바짝 말라버려

음식을 넘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냥 얼른 퇴근해 침대 구석 한쪽 벽에

무거운 이불을 동굴처럼 몸에 감고,

태아 때 자세로 모로 웅크리고 싶은 마음만 간절하다.


이런 날 나는

응급상황에 대처하는 응급실 의사처럼

신속히 국수를 삶는다.

어릴 적에는 웅크리고 누워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랐지만,
어김없이 다음 날은 오더라.


하지만 우울한 기분은 스쳐 지나간다.
순간일 뿐이다  


우리 몸은 생각보다 단순해서

탄수화물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즉각적인 에너지원이 되어 기운이 생긴다.


특히 따끈한 국물을 함께 들이켜는 잔치국수는

기분을 좋게 한다.

국수가 혈당을 급격히 올릴 수 있어

좋은 탄수화물이 아니라고 하지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응급상황에서는 즉효다.

그만큼 급격히 기분이 좋아진다.


삶은 태도다.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내일도 나를 대신해줄 사람은 없다.

체력이 보충되면 내일이 있다.


밥심으로 버틴다. (나는 국수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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