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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범한지혜 Aug 20. 2021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곳으로.

대체휴무일 아침, 알림 소리에 단잠이 깬다.

아침 7시부터 단체대화방이 울린다. 새벽까지 넷플릭스 보다 늦게 잠들었는데...!  


얼른 확인해보니 일단은 내 업무와는 상관없는 주제이다. 대화가 더 진행되어도 내 업무와는 별 상관 없을 것 같아 알람을 일단 끄고 휴대폰을 던져둔다.


호기롭게 다시 잠드려고 하지만, 어쩐지 휴대폰 던진 방향을 향해 누운 나의 뇌 한켠에 메시지들의 잔상이 떠다니는 기분이다.

휴대폰 던진 방향에서 가까운 내 팔이 나도 모르게 움찔거린다.


'에라이, 모르겠다.' 하는 호연지기는
채 1분을 못 넘기고,
결국 휴대폰을 집어든다.

  


일시적으로 단체대화방 알림을 꺼둘 때가 있지만, 어젯밤에는 꺼두지 못했다.

사실 대체로는 꺼두지 못한다.

질문이나 지시에 즉각 반응해드려야 하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나와 상관 없는 주제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해드려야 하는 그 분.


매우 “즉각"까지는 아니라도, 반응이 늦거나 영원히 반응이 없으면 매우 눈치가 보인다.  

늦은 반응을 하는 경우에는 단체대화방에서 꼭 한 소리 하신다.

즉각 반응이 필요한데 반응이 없으면, 전화가 온다. 그러면 예상하지 못한 채 답변을 해내야 한다.

그러니 적절한 타이밍에 반응을 해드리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그 분도 급히 답을 드려야 하는 윗분이 계시기 때문일 것이고, 누군가의 요청 전에라도 미리 답을 정해두어야 하는 때가 많기 때문에 이러는 것임을 안다.

그 분도 그 분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음이다.

늦었다고 혹은 답을 안 했다고 한 소리 할 필요까지 있나 싶다. 우리도 나름 사정이 있는데... 싶다가도 그러려니 한다.


나도 조직에서 선후배 간 중간 정도 끼어 있는 조직의 일원이어서 언제든 저 입장에 처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해하는 면이 있다.

꼰대니 뭐니 하는 말로까지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그냥 좀 피곤하다.
그냥 좀...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다.



직장에서는 윗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나의 태도가 달라진다.

원래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보다 윗사람이 어떤 태도를 원하는지에 따라 나의 태도가 달라진다.

사람 뿐만 아니라 조직만의 분위기에 맞추다 보면 나의 태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윗사람에게나 조직의 분위기에 맞추지 않겠다고 선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능력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도 있고, 기회가 점점 없어질 수 있다.

그 상황을 감당하겠다면 그런 선택을 해도 된다.


직장생활 10년의 경험이 나에게 준 것은,
타인에게 나의 태도를 맞춰 나가는 방법과
나의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조직과 나를 조화롭게 만드는 방법.



나는 솔직하고 주관을 직설적으로 밝히는 성격이다. 나의 주관을 밝히는 데에 두려움도 없다.

솔직하고 정직한 것을 미덕으로 가르친 엄마의 영향도 컸다.

나의 태도나 결심을 옳다고 믿는 성향이 강해 다른 사람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싫어했다. 사실 지금도 싫다.


이런 나는 직장생활 초년차에 엄청난 경험을 했다. 지금도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는 기억이다.


첫 직장, 출근한지 얼마 안된 때였다. 우리 부서장이 나에게 어떤 질문을 했다. 솔직하고 남의 의견에 좌우되지 않는 나답게 아주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무슨 일이든 답정너인 사람이어서
그 상사에게 나는 매우 고집스럽고
건방진 초임이 되었다.
한 마디로 찍혔다.



그 뒤로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으니…


때때로 직장은 반복적으로 자신의 무기력함을 경험하는 곳이 아닌가 한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질책을 듣는 날이면, 해도 안되니까 하지 말자.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세상이 결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조직 안에서 나 자신의 도덕은 통하지 않고, 나의 주관은 무시당하는 다수의 경험을 통해 깨닫는다.  

좌절스러운 점이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좋은 점도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는 능력. 계속 직장의 분위기와 함께 지내는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하면, 결국 도태되는 것은 내쪽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나마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어 그것들이라도 잘 해나가는 능력을 키워나갔다.

나를 잃지 않으면서
회사에서도 도태되지 않도록.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때로는 사회성 없는 사람처럼 받아들여 지는 건 더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조직에서도 사람들에게서도 인정받게 되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나도 싫어하되, 업무상 예의와 협력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지냈다.


지금도 회사에 출근할 때는
회사용 가면을 착용한다고 생각한다.
본래의 나는 문 뒤에 두고 나온다.


회사용 가면을 쓰면 나는 때로는 주관이 뚜렷하고 물러섬이 없는 사람이지만,

때로는 타인을 배려해서 눈치도 보고 가끔 분위기를 살펴 내 의견을 굽힐 줄 아는 사람으로 행동한다.


직장생활 10년차.
이제는 이런 내가 꽤 만족스럽다.


하지만 여전히,
휴대폰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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