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지행동치료 노트]
우리 가족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부산에서 양산으로 이사를 갔다. 양산은 부산에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가까운 지역이고, 우리가 이사갈 때에는 양산시였던 것 같다. 부산 주변에 신도시가 조금씩 생기고 있는 때였고, 양산도 그중 하나였다. 신도시에서 깨끗한 새 아파트를 내 집으로 장만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이사하는 사람들 틈에 우리 가족도 동조했다.
그런데 사실 거의 시골이었다. 논밭이 많기도 했고, 5개 동으로 지어진 우리 아파트는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주변에는 닭농장도 있었고, 버스 몇 정거장 내에 다른 큰 건물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부산에서는 걸어서 다니던 학교를 버스를 타고서 다니게 되었다.
내가 체감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차이는 큰 학원이 없다는 것이었다. 부산에 있을 때는 4층짜리 건물로 된 큰 학원에 다녔다. 사실 큰 학원에 다녔지만 나의 성적은 반에서 중간 정도였다. 중간보다는 조금 더 잘했던 것 같기도 한데, 그때까지 공부 잘한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으니 중간이든 중간보다 조금 더 낫든 별 차이는 없다.
그리고 수업 중에 선생님이 질문을 하면 마음속으로는 답을 안다는 걸 뽐내고 싶은 열망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혹시나 틀릴 까 봐, 틀리면 친구들이 비웃을까 봐 졸아서 답도 못하던 자신감 없고 소심하던 아이였다. 다른 친구가 손을 번쩍 들어 답을 맞히고 나면, ‘아쉽다. 내가 알고 있는 게 맞았네…’ 뒤늦게 이런 생각이나 하는 아이가 나였다.
우리 집에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늘 전교 1등 하던 우리 오빠가 있었기 때문에, 내 성적은 우리 집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았고, 부모님도 내가 성적을 받아올 때마다 “우리 딸도 잘하지. 중간보다는 잘하면 잘하는 거야.”라고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부모님이 북돋아 주신 적도 없고,
못한다고 질책하신 적도 없으니,
어린 내 기억에도 내 인생이 달라질
무슨 계기가 있을까 싶었다.
오빠랑 같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입학했을 때부터 학년이 바뀔 때마다 선생님들로부터 “니가 OO이 동생이가?” 소리를 들었다. 내 얼굴이나 성적을 본 선생님들은 한결같이 ‘오빠랑은 다르네’하는 표정으로 말없이 나를 지나쳤다.
(참고로 우리 오빠는 축구, 달리기 등 남자아이들이 잘하면 돋보이는 운동도 다 잘했고, 크면 여자 꽤나 울리겠다, 그럴만한 잘생김이 있었다. 반장은 늘 했고, 6학년 때는 전교회장이었다. 자연히 친구들 사이에도 인기 많은 아이였다.)
돌이켜 보니 나에게는 일종의 상처였다. 오빠와 늘 비교당하고 오빠에 비해 존재감이 떨어지고, 원래도 얼마 없었던 자신감은 점점 떨어졌다. 더 소심하고 내성적인 아이가 되어 갔고, 그럼에도 마음 속 불꽃은 타올라 열등감까지 충만해져 갔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지만,
양산이라는 신도시는 나에게
다른 의미로 신도시였다.
초등학교 5학년 전학. 보통 초등학교 고학년에 전학을 가면 성적이 떨어진다고들 한다. 우리 엄마도 그 걱정을 하셨었다.
(엄마는 그 와중에도 오빠 걱정은 안 했다. 어디 가서 든 잘할 거니까.)
웬걸. 전학 후 첫 시험에서 반에서 5등을 했다. 이 등수는 부산 학교에서도 해 본 적 없던 등수였다. 내 인생에서 5등이라는 등수 자체가 없었다. 반 친구들 모두와 부모님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약간 놀라면서 경계하는 듯한 시선.
전학 가본 경험이 있는 사람만 알 것이다. 시험 치기 전까지 관찰의 시선으로 새로운 친구를 바라보는 면이 있다. 그리고 시험 결과를 보면 반 친구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정해진다. 선생님의 시선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 놀라운 성적 향상에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반에서 5등이라니…
5학년 동안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성적.
그다음 시험에서는 성적이 더 올랐고, 내 성적은 점점 상위권 성적으로 굳어졌다. 성적이 상위권이 되니 변하는 게 많았다. 솔직히 노는 물이, 어울리는 친구들이, 선생님이 나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기회가 많아졌다. 그때까지는 해 본 적 없던 각종 대회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다. 선생님들이 수업 후 조용히 부르셔서 가보면, 각종 대회 포스터를 보여 주며 대회에 출전하라고 하셨다. 수학, 과학실험경시대회, 글짓기 대회, 합창대회… 각종 대회에 반대표, 학교 대표로 도대회까지 나가게 됐다. 부산에 있을 때는 전혀 나에게 돌아오던 기회가 아니었다. 대회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6명씩 분단을 짜서 자리 배치를 했었는데, 우리 반에서 제일 성적이 좋은 아이들 여섯 명을 선생님 교탁 제일 앞에 분단에 앉히셨다. 물론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 어린 마음에도 선생님의 편애가 누군가에게 불편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우등생 대접이 나쁘지는 않았다. 반 친구들 사이에서도 뭔가 성골 같은 대접. 달콤했다.
전학 오기 전과 후 어느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나라는 사람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작은 성취가 차곡차곡 쌓여 갔다. 작은 성취 하나하나는 그동안 내 마음속 열정을 막았던 두려움을 하나씩 무너뜨렸다.
나도 할 수 있구나.
나는 점점 나를 믿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학 후 첫 성적이 올랐다는 것이 내가 갑자기 대단했던 게 아니다. 부산보다 학급 인원 수가 3/4 수준이고, 반에는 나처럼 이사 온 아이들보다는 큰 학원이 없는 그 동네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단지 상대적인 교육 격차에 따른 학업 성취도 차이였을 것이다.
부모님도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그래서 우연일 뿐이었던 상황. 나는 선생님의 질문에 틀리더라도 손을 들고 답할 수 있는 아이가 되었고, 주어지는 새로운 환경에 설레는 마음으로 뛰어드는 사람이 되었다. 이때의 강렬했던 성취의 경험들은 어른이 된 나에게도 지금까지 교훈이 된다.
사람에게 성취의 경험은 중요하다. 처음부터 너무 큰 것을 성취하려고 너무 멀리만 바라볼 필요도 없다. 작은 성취의 경험들이 쌓이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게 하기도 한다. 때로는 잦은 좌절의 경험이 사람을 다른 사람이 되게 하기도 하는 것처럼.
나에게 진짜 신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