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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범한지혜 Apr 30. 2022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정체성

[나의 인지행동치료 노트]

어제는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일흔이 아직 못되셨는데, 지병으로 요양병원에 입원 중에 악화되어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나이 마흔이 다 되고 보니 일년에 서너번 이상은 상갓집 갈 일이 생긴다. 결혼식장은 축의만 하고 직접 안 가는 경우가 많지만, 장례식장은 왠만하면 가려고 한다. 내 부모님은 아직 모두 살아계시니 나중을 위해 보험드는 심정도 반영되어 있지만, 나에게는 장례식장이라는 공간 자체가 특별하다. 그 공간에 드나드는 것만으로도 나를 일으켜 올리는 힘을 준다. 여기까지만 말하면, 나는 남의 불행을 내 삶의 안온함과 비교하고 내 삶의 원동력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으로 비춰질지도 모르겠다. 그런 세속적인 마음이 아니다. 장례식장은 내게 정말 각별한 의미가 있다. 


우리 엄마는 장례지도사였다. 

내가 어릴 때는 영안실과 장의사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했다. 엄마가 그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가 15년 즈음 전인가... 내가 고시공부를 시작할 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 15~16년 정도가 된 일이다. 그때 즈음부터 '영안실, 장의사'라는 말보다 '장례식장, 장례지도사'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대학에 따린 평생교육원이나 각종 복지원에서 그런 교육과정이 개설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오십 초반 나이에 엄마는 부산의 어느 대학 평생교육원에서 장례지도사 과정을 이수했다. 옷장사, 노인병동 호스피스 등을 거친 엄마의 다음 직업이었다. 장례 절차도 배우고, 수의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지, 관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배웠고, 시체 염습도 배웠다. 그리고 나서 어느 새로 개업한 암전문병원에 딸린 장례식장의 실장님으로 취업에 성공했다. 155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몸의 엄마는, 까만 정장을 입고 까만 서류 가방을 가지고 다니며, 밤이고 낮이고 없이 일했다. 암병동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환자의 가족을 만나 장례절차를 설명하기도 하고, 핸드폰을 머리맡에 두고 갑자기 사람이 죽었다는 연락이 오면 한밤중에 자다가도 달려 나갔다. 


엄마가 이 일을 4~5년 정도 했던가? 엄마의 이 일로 우리 집 빚을 거의 다 갚았고, 대출은 많이 받았지만 빌라도 한 채 샀다. 돈이 필요했지만, 왜 하필 그 일이었을까. 과거부터 무당이나 백정 같은 취급을 받던 일이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 해도 그 일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꺼리고 터부시하거나 무서워 하는 일이었다. 하던 옷장사는 망했고, 빚은 쌓여 가고, 자식 둘이 대학을 가야 하는 상황에서 앞날을 어찌 살아야 할지 고민이 많던 상황이었다. 엄마는 기도 중 깊은 명상 속에서 불현듯 장례 일을 하라는 계시를 받았다는 듯이 말했다. 부모가 더럽고 천한 일을 하면 자식이 성공할거라는 막연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엄마는 이제껏 그런 마음의 소리를 따라 살아왔고, 마음이 정해지면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는 사람이었다. 


엄마가 처음 장례일을 한다고 했을 때, 왜 하필 저런 일일까 생각하지 않았다. 항상 그랬뜻이 엄마를 믿었다. 하지만 엄마가 기도 중에 부모가 더럽고 천한 일을 하면 자식이 성공할거라고 했기에 이 길을 선택했다는 말을 그 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어째서 그렇게 연결이 되겠냐는 의심 가득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엄마의 그 말을 알 것 같다. 우리 남매는 종종 엄마가 일하는 장례식장에 들렀다. 엄마의 퇴근 시간이 불규칙적이니 엄마를 보러 가거나 엄마랑 같이 밥을 먹으러 갔다. 우리는 종종 엄마 일을 도왔다. 나는 장례식장 카운터에서 엄마 대신 전화를 받기도 하고, 오빠는 엄마가 시신 염습을 할 때 일손이 필요하면 도왔다. 시신을 뒤집고 들어서 넣고 하는 등 엄마를 도왔다. 

 

엄마 표현에 따르면, '깨끗하게 돌아가신 시신'은
우리도 함께 냉동된 시신을 꺼내어 시신의 몸을 닦고
시신에 옷을 입히는 염습을 하기도 했고,
염습이 끝난 시신을 냉동창고에 다시 들어 넣는 일을 돕기도 했다.

중학교 때 할아버지, 할머니 돌아가실 때 염습되어 있는 시체를 본 적은 있지만, 직접 염습을 해본 적은 없었다. 약간 무서운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더럽다거나 끔찍하지는 않았다. 엄마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랬다. 그 일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엄마로 인해 다 의미 없어 졌다. 그저 장례일은 나에게 소중한 우리 엄마가 하는 일일 뿐이었다. 


소심하고 소극적이던 아이였던 나는 엄마의 인생을 보면서 달라져갔다. 엄마는 나의 자부심이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엄마의 삶은 나에게 자부심이었다. 엄마가 살아온 여러 삶이 저절로 나에게 여러 삶을 살게 했다. 나는 엄마의 인생을 지켜보면서 배웠다. 엄마를 보면서, 엄마를 도우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엄마가 나에게 무엇이 되라고, 무슨 일을 하라고 강요하거나 잔소리 한 마디 조차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엄마의 삶을 지켜보아온 것만으로도 지금의 나는 내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다.


엄마가 천하고 더러운 그래서 남들이 꺼리는 일을 하면,
자식에게는 태산 같은 가르침을 준다는 말.
엄마의 삶의 모습 그 자체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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