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알아야 하는 이유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한 명의 행동에 여러 사람이 관련된 경우 혹은 한 명의 지시로 여러 사람이 행동을 한 경우 높은 자리에 있거나 그 지시한 사람이 종종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정치인들이 자주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정당에서 돈 봉투 사건이 터져 시끄러운데, 거기서도 누군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애꿋은 사람들을 압수수색하지 말고 본인만 수사하라고요.
이 말을 한다고 그 사람 혼자
모든 책임을 지게 될까요?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실 분이 있으실까 모르겠습니다만. 저런 말은 적어도 법적 책임 측면에서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혼자 모든 책임을 진다?)
그렇지 않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물론 이런 말이라도 하는 사람은 칭찬해 주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쉽게도 “내가 다 책임질게!” 하는 그런 낭만의 시대가 이제는 지나간 것 같거든요. 과거보다는 이런 말뿐인 말조차 시원스럽게 하지 않는 경우도 많지요.
그렇더라도 저런 말이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한다.“ 정도의 의미 외에는 공허한 메아리라는 건 변하지 않습니다. 저 말이 비록 진심이더라도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순수하게 대신 책임까지 지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도 저런 말을 내놓고 하는 데에는 숨은 이익이나 정치적 의도가 있을 겁니다.
그럼, 왜 그렇지 않을까요?
다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 혼자 다 책임지게 하지, 왜 그렇지 않은가요?
누구나 자신의 행위와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그렇지요.
누군가 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저지르고, 그 행위로 인한 결과가 생겼습니다. 그 행위를 저지른 사람은 그 결과에 대한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합니다. 법학은 우리 삶에 이미 있는 질서를 조금 더 엄격한 투로 정해둔 것뿐이거든요.
법학에서 책임주의라고 합니다.
다만 행위를 한 사람이라도 책임을 지지 않을 수도 있는 몇 가지 경우를 정해두고 있습니다.
책임능력
위법성 착오
적법행위의 기대가능성
최근 들어 연령을 낮추자고 주장하는 촉법소년이 바로 책임능력에 관한 문제입니다. 상하관계에서 지시를 거부할 수 없는 특별한 상황이 있었다면 강요된 행위로서 적법행위에 대한 기대가능성에 관한 문제로 볼 수 있습니다.(하지만 극단적인 상황 없이 보통의 상하관계에서 지시에 따른 행위인 경우 기대가능성으로 빠져나가기는 힘듭니다.)
책임을 행위자에게 모두 물을 수 없거나 모두 묻는 것이 부당한 경우를 일부 정하고 있을 뿐, 우리 법은 근본적으로는 각각의 행위에 대해서는 각각의 행위자가 책임진다는 책임주의를 관철시키고 있습니다.
“대신 책임 져주겠다, 내가 다 책임지겠다”라는 말을 아무리 해도 법적인 책임은 대신 져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쁜 짓을 누가 시킨다고 다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 나쁜 짓은 결국 내 손으로 한 거니까요. 내가 처벌받을 수도 있다는 걸 명확하게 인식하고 하면 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모든 인간은 자신의 주인이며, 자신의 실존에 대한 전적인 책임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주인으로서 무한한 자유를 부여받고, 그 자유만큼 무한한 책임을 지고 살아갑니다.
이맘때 민들레 홀씨 부는 걸 좋아합니다. 내 숨 한 번에 훌훌 날아가는 홀씨를 봅니다. 어디 떨어진 곳이 보이는 홀씨도 있고, 순간적인 바람에 훅 저 멀리 날아가버리는 홀씨도 있습니다.
가끔 내가 불어 날린 저 작은 홀씨 하나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 떨어져 꽃을 피울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면 그 무한한 가능성에 공포가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의연하게 받아들여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