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을 위한 변론 _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어떤 시사프로그램 방송 중 보수 정부의 경제정책을 이야기하다, 한 정치평론가가 상대방 패널을 향해 언제적 애덤 스미스고, 언제적 보이지 않는 손이냐고 목소리를 높이더군요. 마치 애덤 스미스는 벌써 예전에 세상을 떠났고, 보이지 않은 손은 정말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이런 상상 한 번 해볼까요?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는 거리. 큰 붓으로 햇살을 듬뿍 찍어 수채화를 그려 놓은 듯 화사한 거리입니다. 길 양 옆으로 옷가게가 늘어서 있습니다. 말끔한 신사 한 분이 큰 유리창 앞에 멈춰 섰습니다. 근사한 셔츠가 걸려 있습니다. 신사는 옷 가게로 들어섭니다.
옷 가게로 들어선 순간, 햇살은 안으로 따라들어오지 못합니다.
이제부턴 거래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신사는 밖에서 보았던 셔츠를 입어봅니다. 막상 입어 보니 살결에 닿는 감촉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색깔이 잘 어울리는 것 같지도 않아요.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요. 가게 안에는 많은 셔츠들이 있거든요. 색깔도 디자인도 옷감도 다양한 많은 셔츠들이 신사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 신사는 어떤 셔츠를 고를까요?
우리가 물건을 고를 때의 기준은 분명합니다. 가장 좋은 물건을 가장 싸게 사는 것, 이것이 기준입니다.
간편하게 입을 셔츠라면 내가 얼마를 쓸지 가격의 범위가 대체로 정해져 있겠지요? 내가 입는 셔츠의 스타일, 디자인, 옷감, 브랜드도 대체로 범위가 정해져 있습니다.
많고 많은 셔츠 중에서
내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셔츠를
가장 낮은 가격에 사는 것이
바로 거래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셔츠를 만든 사람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디자인하고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셔츠를 파는 사람이 현재 얼마나 곤란한 처지에 있는지도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같은 셔츠를 옆 가게에서 할인하여 싸게 팔고 있다면 옆 가게에서 살테니까요.
비정한 거래의 세계입니다.
거리의 따스한 햇살은
가게 안을 비추지 못합니다.
거래가 이렇게 비정해도 괜찮을까요?
우리가 셔츠를 살 때 셔츠를 만드는 사람이 얼마나 정성을 들여 셔츠를 만들었는지도 생각해보고, 셔츠를 파는 사람이 현재 얼마나 곤란한 처지에 있는지도 생각해보고 셔츠를 사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이기적인 기준만으로, 가장 좋은 물건을 가장 싸게 사려고만 한다면 나중에 사회 전체적으로는 손해가 발생하지는 않을까요?
애덤 스미스는 약 250년 전인 1776년
<국부론>이라는 책에서
그런 걱정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사람들이 오로지 자기의 이기적인 이익만을 위해서 ‘시장’에서의 ‘가격’을 기준으로 자유롭게 ‘거래’를 하고 ‘경쟁’을 하는 것이 오히려 사회 전체적으로도 이익이라고 말했습니다.
애덤 스미스의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 ‘경제학’이라는 학문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근본적으로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지요.
그런데 애덤 스미스의 주장에 의심을 품고,
그에게 도전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기적인 이익만을 위해서 거래를 하고 경쟁을 하도록 두는 것이 왠지 걱정이 되기도 하고, 사회 전체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지요. 충분히 그럴 만도 합니다.
자유로운 거래는 자유로워서 좋지만,
한편으로 끊임없이 사람들끼리 경쟁해야
하는 것이지요.
모두가 고달픈 일입니다. 정치인들은 사람들의 이러한 고달픈 마음을 그대로 두지 않고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합니다. 경쟁으로 지친 사람들에게 솔깃한 얘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의 제자들, 즉 대부분의 현대 경제학자들은 애덤 스미스의 주장에 의심을 가진 자의 도전에 맞섭니다. 경쟁이 고달프다고 회피하려다가 점점 더 고달픈 일이 생긴다고 경고합니다.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보이지 않는다고 정말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애덤 스미스는 여전히 우리 가장 가까이에 살아 있습니다.
영원히 사라지지도 않을 겁니다.
시사 프로그램에서 정부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평론가는 정치 평론가였어요.
정치평론가라서 그러려니 해야 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