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무관했던 내가 공익 변호사를 꿈꾸게 된 6개월
2013년 9월, 나는 학부 시절 처음으로 인턴 생활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업 공익변호사 단체,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이었다.
나는 이공계 대학을 다녔지만, 변호사 진로 고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대학의 총장은 각종 경쟁 시스템을 도입해 학교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징벌적 수업료 정책이 있었는데, 일정 성적 이하 학생에게 낮은 학점에 비례해 높은 수업료를 부과하는 제도였다. 이 시기에 나와 동기인 학생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가까이서 이런 비극을 경험하고 나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그 과정에서 변호사라는 직업에 관심이 생겼고, 검색을 하다 우연히 알게 된 공감이라는 단체에 인턴으로 지원했다.
공감의 활동 분야는 장애인권, 이주·난민, 빈곤·복지, 국제인권, 취약노동, 성소수자, 공익법 교육 등 다양했다. 이런 광범위한 영역을 다룬다는 사실이 신선했고, 내가 몰랐던 세계가 이렇게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감은 로스쿨 지망생이 공익법 실무를 경험하기 위해 많이 지원하는 곳이었다. 법 관련 경험이 전혀 없던 나는 운 좋게 합격해 6개월간 인턴 생활을 하게 됐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지금은 인턴을 ‘자원활동가’라고 부른다.)
인턴은 국내팀과 국제팀으로 나뉘었는데, 나는 경쟁률이 조금이라도 낮을 것 같아 국제팀을 선택했다. 국제팀의 업무는 비교법·국제법 연구, 법률상담·소송 지원 관련 통·번역, 해외 문헌 조사 등이었다.
인턴마다 담당 사수 변호사가 배정됐고, 내 사수는 성소수자 인권을 주로 맡고 있었다. 내가 처음 맡은 일은 성소수자 관련 미국 대법원 판례 번역이었다. 이후 성소수자 관련 책자 발간을 위해 녹취 내용을 풀어 쓰고, 법원과 노동 현장을 방문하며, 각종 법률 세미나에도 참석하고, 공익인권법 캠프 준비에도 참여했다.
학부 수업과 병행하며 주 2회 정도 출근했지만, 매번 새로운 현장과 사람을 만나는 시간이 이어졌다.
사무실은 안국역 근처, 창밖으로 창덕궁이 내려다보이는 멋진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건물은 낡았고, 좁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책상은 비좁았고 회의실은 간이 벽으로 만든 공간에 테이블과 의자만 겨우 들어가는 크기였다. 그마저도 하나뿐이었다. 첫 출근 날, 사무실 안은 조용했지만 집중된 분위기였다. 구성원들의 표정에는 자신감과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나도 그 에너지에 감화됐다.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공익 변호사라는 직업에 대한 동경을 심어주었다. 공감은 수임료를 받지 않고 시민들의 풀뿌리 후원금으로만 운영되는 단체였고, 구성원들의 보수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직업에 대한 열의는 그 어떤 보수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다양한 인권 사안을 다루는 일을 보며, 이후로 인권 취약지대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특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 파주에 있는 아프리카 박물관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들을 만나러 갔을 때였다. 폭 2m 남짓한 비닐하우스형 숙소에서 6~7명이 함께 지내고 있었고, 난방과 환기 시설은 거의 없었다. 사생활을 지킬 공간도 없었으며, 여권은 압수당한 상태였다. 임금 체불과 장시간 노동 등 노동 착취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업무를 통해 배우는 점도 많았지만, 새로운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것이 가장 값진 경험이었다. 공감의 구성원뿐 아니라 업무 중 만난 활동가들, 함께 일했던 인턴들 모두 인권 감수성이 높았다. 나이가 어리다고 반말을 하지 않았고, 서로를 존중했으며, 차별이 될 수 있는 표현을 조심했다.
인턴이 끝난 뒤에도 로스쿨 진학을 고민했지만, 전공을 살리기 어렵다는 점, 학비, 공익 변호사 불안정성 등 현실적인 이유로 진학하지 않았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공익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 짧았지만 강렬했던 경험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익 변호사의 길은 생각보다 많은 현실적인 장벽이 있었다. 결국 나는 또 한 번의 진로 전환을 고민하게 된다.
운동을 통해 길러진 승부욕은 대치동 학원가를 거쳐 치열한 입시 경쟁으로 이어졌다. 과학고와 기숙사 생활, 그리고 끝없는 경쟁 속에서 느낀 압박과 회의감. 이공계로 진학하게 된 배경과 그 과정에서 겪은 성장과 한계를 이야기한다.
2부 — 법과 무관했던 내가 공익 변호사를 꿈꾸게 된 6개월
대학 시절,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 보낸 인턴 생활. 성소수자, 난민, 취약노동 현장을 직접 경험하며 공익 변호사라는 직업에 대한 동경이 생겼다. 비좁고 낡았지만 열기로 가득한 사무실에서 배운 것들을 기록했다.
공익 변호사의 꿈은 있었지만, 현실적인 장벽과 경제적 부담 속에서 다른 길을 모색했다. 외교관을 꿈꾸기도 했지만 WHO 인턴 경험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어, 결국 행정고시를 도전하게 된 과정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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