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를 만나는지에 따라 자기의 위치가 정해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들으면 늘 가슴이 철렁한다. 어떤 사람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삶에 아주 큰 부분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그 부분들이 쌓이고 쌓여 인생의 방향이 결정된다고도. 나는 이 말을 아주 무서워한다. 나는 대체로 혼자 있고 크리스마스나 연말에도 같이 보낼 친구들이 없는데 나, 아무래도 잘못 살고 있는 걸까? 갑자기 깊은 늪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내가 더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고, 더 좋은 직장에 들어가지 않고, 더 좋은 사람이 아니라서 친구 할 만한 사람이 아닌가? 앞이 깜깜하다. 이 명제에 역이 성립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자꾸 모자란 점만 내 안에서 뒤지게 된다.
나는 글쓰기를 오랫동안 두려워했다. 말로 어찌저찌 꾸밀 수 있는 것들이 글에는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는 시국 걱정도, 내 업무에 대한 통찰도 내 미래에 대한 계획도 다 유치하게 하는 것 같다. 나는 내 바닥이 들킬까 봐 걱정된다. 몇 달 전 방송국 피디인 친구 A와 법조인인 친구 남편, 그리고 방송 작가인 다른 친구 B와 그 사회부 기자인 친구 남친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이서 친구네 집에서 술을 마신 적이 있다. 다들 꽤나 거나하게 마셔서 알딸딸해진 상태였다. 그때 친구 B가 남친을 놀리며 이렇게 말했다.
“야 얘는 완전 꺼삐딴 리야”
옆에 친구 A가 남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얘는 완전 헤겔이야”
순간 깜짝 얼어버렸다. 나도 ‘꺼삐딴 리’와 ‘헤겔’이 뭔지는 안다. 중학교 때 교과서쯤에서 본 것 같다. 하지만 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알고 있지는 않다. ‘뭐더라? 기회주의자…라는 뜻인가?’ 친구들이 대화하고 있을 때 몰래 구글에 급하게 검색해 봤다. 아… 그 일제강점기 소설… 헤겔은 철학자…. 짐짓 아는 척 앉아있는데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 나 무식한 거 여기서 들키면 안 되는데…’ 술이 확 깼다.
친구관계는 어쩌면 서로가 가진 무언가를 조금 좋아하고 대단히 여겨줘야 지속 가능한 것인 것 같다. 내 친구들은 내가 영화하고 드라마 한 것을 대단하게 쳐준다. 나는 내가 거기서 허접한 일을 했는데도 친구들이 계속 내 친구였음 해서 그냥 내버려둔다. 하지만 알고 있다. 내가 무슨 변변치않은 일을 했는지에 대해. 그런데 다 까버리면 나를 안 좋아할까 봐 말하지 않는다. 내가 친구들과 어울릴만한 사람이 아니면 어쩌지 하고 염려한다.
…여기까지 쓰고 내가 뭔가를 빠뜨렸단 생각이 들어 쓴 글을 다시 찬찬히 읽어봤다.
음…사실은 알고 있다. 이 모든 불안의 근원은 내 안에 남을 무시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내가 다른 사람을 그런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면 남이 나에게 감히 그럴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남을 너무 자주 판단한다.
내가 친하게 지내고 싶은 친구들은 ‘꺼삐딴 리’와 ‘헤겔’을 농담처럼 말하는 친구들이다. 하지만 내가 일이나 사회적으로 만나 나와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뭐 말 같지도 않은 장광설로 모두의 시간을 장악하는 사람, 이성적인 척하며 거룩함에 취해있는 사람들을 나는 참을 수 없다. 누군가가 진지하게 헛소리를 하면 나는 꼭 일침을 놓고 싶어 한다. ‘훈장님이야 뭐야 무슨 훈수를 둬’라고 멈췄다가도 속으로 ‘저 무식한 새끼가 무식한 생각만 한다’고 불평한다. 가끔은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이 너무 별로라 괜찮은 나에게 묻을까 염려되었다. 하지만 나도 어떤 집단에서는 멍청하고 급이 안되는 사람이다. 우월감과 하찮음 사이 어딘가를 표류하는 나는 다시금 깨닫는다. 모든 관계는 불균형하다. 지난번 그 술자리에서 내가 너무 보잘것없이 느껴졌던 건 비단 대화에 끼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건 내가 그동안 마음속으로 무시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부끄러웠던 것 같다. ‘나도 남을 무시해서 남이 날 무시할 것만 같았어…’ 이 말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나를 나라는 인간 자체로 입체적으로 봐주길 바라지만 나는 남을 늘 납작하게 본다. 아 쟤는 어디 다니고, 똑똑하더라니 좋은 대학 나왔구나 하면서 마음 속으로 재고 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리고 이 판단 기준에서 나는 한참 부적격하다. 좋은 학교를 나오지도, 부자 출신도 아니고 그냥 겨우겨우 산다. 이런 내가 너무 초라해서, 이런 모습까지는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는 글을 지우고 싶었다. 오늘도 나는 괜찮아 보이는 척 겁쟁이의 삶을 산다. 용기가 부족한 나는 쉽게 글을 쓰는 것이 나의 치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취약성을 드러내며 연대하는 페미니즘 뭐 그런 말들도 있는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어떤 사람은 타인에게 속을 보여주는 것이 약점 잡히는 일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깊게 연결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여전히 나는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 고민 중이다.
끼리끼리는 싸이언스라는데 내가 지금 어떤 끼리에 속해있나 생각해 보았다. 어디에도 내 자리는 없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유는 알고 있다. 사람들이 나의 얕은 바닥을 보면 떠날 거라는 생각을 하고, 그래서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남들에게는 같이 무얼 하자고 제안하지 못하면서도 인스타에 친구들이 같이 독서모임을 하거나 등산을 간 사진을 보면 용심이 난다. 나도 저기 끼고 싶은데 너희들은 이미 친하구나.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지금이나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니! 솜털이 날것만 같다. 무사히 할머니가 된다면 ‘과학적으로’ 나에게 잘 맞는 무리 안에 잘 낄 수 있을까. 솔직히 좀 어려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