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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상준 Nov 06. 2023

1화.  다시 걸음마를 배우는 어른

 태어난 아이들은 돌이 지나면 스스로 엉금엉금 기면서 일어난다. 일어났다 쓰러지고 또 일어나고 하는 모습은 참 귀엽다. 적어도 어른들의 눈으로 보면 그렇다. 아이가 일어나서 겨우 몇 발짝 걷다가 쓰러지고, 그러다가 다시 일어나 뒤뚱뒤뚱 걷는 모습에 웃지 않을 부모가 없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모든 걱정과 시름은 사라지고 아이와 하나가 되어 아이 몸이 내 몸인양 웃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아이 스스로에겐 당연히 거쳐야 할 과정이지만 힘든 과정이다. 단지 말을 못 할 뿐이다. 쓰러지면 아플 것이고 다시 그 몸을 일으켜 세우려면 힘이 들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그렇게 나아가면서 배우는 걸음마.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배우고 익히며 나아간다. 걸음마로 시작하여 걷기 시작하고 그리고 뛰기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의 모든 것은 걸음마로 시작이 된다.


 그런데 어른도 걸음마로 시작한다. 우스운 이야기겠지만 진짜 그렇게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다리의 각도와 보폭 그리고 자세 등을 정확히 해서 내디뎌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걸음을 배우지 못한다. 어찌 보면 아이보다 더 힘들고 어렵다. 아이는 이리저리 자기 마음대로 걸을 수 있지만 어른은 그렇게 하면 배우지를 못한다. 더 이상 진도를 나갈 수가 없기에 아이보다 걸음을 배우는 게 더 어려운 이유이다. 패션모델의 모든 첫걸음은 아기의 걸음마처럼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내딛는다. 그런 자세를 통해 배우고 연습해서 익히지 않으면 모델의 워킹 자세는 힘들어진다. 모델들은 모두 이런 걸음마부터 배우고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어른이라도 이렇게 예외 없이 걸음마를 배워야 한다.


 10여 년 전 어느 날이다. 직원 한 사람이 나보고 워킹을 배워보라고 말을 툭 던진다. 신문에 난 조그만 기사를 보고선 점심 식사 후에 커피를 마시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을 던진다. 난 깜짝 놀라 너털웃음을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패션모델 워킹 수업을 주 1회 2시간씩 4주간 무료로 진행한다는 기사, 그 글이 적힌 신문을 슬그머니 내 앞에 내민다. 나는 콧웃음 한방에 그 신문을 날려 보내고선 그 말을 묻어버렸다. 그런데 다음날 내 책상 위에는 그 기사가 적힌 신문이 오려져 놓여 있었다. 나는 멍하니 쳐다만 본다. 그런데 한 번을 보니 또 보게 되고 또다시 읽어보며 서너 번을 본 것 같다. 그러자 갑자기 속에서 꽈리를 틀고 조용히 앉아만 있던 욕망이란 놈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나한테 어울릴 것 같아 그냥 한 마디 해봤다고 하는 그 직원의 말에 지하 깊은 곳의 마그마는 솟아오를 장소만 찾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모델 교육업체에서 공공기관의 강당을 빌려 시니어 수강생들을 모집하여 무료로 수업을 실시하는 과정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 달간의 무료 수업은 수강생들을 모으기 위한 미끼 수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엉뚱하게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그 길을 나는 가기 시작했다. 그 길은 가보지 않았던 또 하나의 길이었다. 떨리는 걸음으로 가서 등록을 하고 강당에 들어서니 20명의 사람들 중 남자는 나 혼자다. 그것도 지난주에 한 남자가 첫 수업을 받고선 자신이 부끄러워 포기하고 비워진 자리였다. 그 빈자리를 다음 주에 내가 채우게 될 줄이야, 운명이랄까.


 젊은 여자 모델 강사의 지도를 받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걷는다. 곧추 세운 자세를 흐트러지지 않게 하면서 걷는다. 이미 굽은 등을 바로 세워 넓은 보폭을 유지하며 걸으려고 하니 자꾸 뒤뚱거려진다. 마치 돌 지난 아기의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과 내가 중심을 잡으려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이 똑같다. 그리고 힘들다. 아기의 심정을 어른이 된 지금, 이제야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다. 아기와 나는 그렇게 걸음마를 시작한다.


 예견한 대로 한 달이 지나고 나니 정식으로 3개월 수업을 요구하기에 공짜 수업을 들은 게 미안해서 수업료를 지불하고 끊었다. 그런데 모델 워킹은 만만치가 않았다. 나는 우연히 수업에 참가하였기에 모델과 워킹에 대해선 약간의 상식도 없었다. 한 달 동안 열심히 다니면서 배운다고 하였지만 배우면서 보니 수업의 폭은 점점 다양하고 넓다. 그렇지만 남자 혼자로서 한 달을 버틴 결과 이제는 청일점의 부끄러움은 사라지고 없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앞날과 운명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 치 앞을 모르고 살아가는 게 우리 인간의 삶이 아니던가. 조그만 교육 사업을 하고 있던 내가 취미로 배우기 시작한 이 워킹이 그것으로 인해 내 앞날의 새로운 일거리가 될 줄이야. 가보지 않은 그 길을 감으로써 운명이 바뀌었음을 아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 나도 다시 배운 걸음마로 다른 길을 걸어갔고, 그 길이 새로운 길이였음을 한참 뒤에서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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