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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상준 Oct 11. 2023

3화. 카오산 로드에서 밤비를 맞다

 중국에서 유래된 말 중에 우리가 많이 쓰는 점심(点心)이라는 말이 있다. 아침과 저녁 사이에 밀려오는 배고픔을 마음에 점을 찍듯 간단히 요기하며 넘긴다는 말이다. 물론 지금의 현실에선 더 푸짐하게 잘 먹어야 오후 

일도 잘할 수가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아침은 호텔 조식으로 먹었지만 길을 찾느라 많은 에너지가 소모가

되었는지 호텔에 들어오니 배가 고파온다. 짐을 풀고 정리를 하고 땀 흘린 몸을 씻고 난 뒤 점심 요기를 하러 

나선다. 내 폰을 달라고 하더니 또 폰으로 구글 맵을 보며 앞장서 걷는다. 기왕이면 맛집에 가서 먹자고 한다.

맞는 말이다. 같은 돈이면 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낫긴 낫다. 그렇게 잘 아는 집을 찾아가듯 따라만 오라고 

자신 있게 손짓하며 걷던 사람이 교차로 부근에서 다시 멈춘다. 폰을 또 이리저리 돌리며 왔다 갔다 한다.


 불안하다. 조금 전의 악몽이 다시 살아나는 거 같다. 배가 고프니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먹자고 재촉을 해본다. 아니 이젠 내가 짜증을 낸다. 한국에선 구글 맵으로 길을 찾아가는 일이 없기에 맵은 오늘 처음 해보는 거다. 과연 초보자의 눈에 길이 제대로 보이겠는가. 여기로 가면 된다고, 조금만 가면 된다고 하며 이리저리 끌고 다니길 벌써 20여분 가까이 돼 간다. 이젠 마음에 점을 찍듯 간단히 넘길 상황이 아니다. 다리가 무겁고 힘이 자꾸 빠져나가 배를 가득 채워야만 한다. 금년 1월부터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고 당뇨약을 먹기 시작했다. 나이 탓에 생긴 병이라 생각하고선 식후에 꼬박꼬박 약을 먹는다. 그렇기 때문에 제때 먹지 않으면 힘이 빨리 없어지는 것 같다.


 노점들이 늘어선 좁은 길에서 앞으로 갔다가 다시 뒤로 돌아오고 하며 계속 부근을 맴돌고 있다. 참을성의 한계를 넘어서기에, 나는 앞에 보이는 가게 사람에게 다짜고짜 다가가선 짧은 단어 몇 개를 던지며 물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책 속의 맛집 그림까지 보여준다. 갑자기 얼굴이 밝아지더니 웃음이 번져간다. 그 모습에 나도 안도감이 돈다. 찾았나 보다. 예상대로 찾았긴 찾았다. 바로 건너 건너 옆집이란다. 재래시장의 길 옆에 나 있는 가게라 간판이 제대로 없는 집이다. 그래서 왔다 갔다 하며 제대로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힘이 빠지는 말 한마디를 툭 던진다. "오늘은 가게를 쉰다"라고. 고개를 돌려 그쪽을 보니 가게의 셧터 문이 굳게 내려와 있다.


 그동안 우리가 걸어왔던 길이 그 유명한 방콕의 카오산 로드였다. 카오산 로드! 전 세계 배낭 여행자들의 집합 장소이자 한 번은 거쳐가야 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방콕 시내 방람푸 지역에 있는 불과 300m 정도의 이 거리가 많은 여행자들이 방콕에 오면 반드시 와야 한다는 관문인 곳이다. 그러니 폰으로 구글 맵을 쳐다보면서 이곳의 맛집 음식 맛을 보여주겠다고 나를 끌고 온 것이다. 그 정성이 이제 이해가 간다. 하지만 가게는  야속하게도 문을 굳게 내린 채 다른 곳으로 가라고 손짓을 한다.

태국에서의 첫 번째 맛집 식사는 결국 다른 음식집에서 해결하고선 지나가다 봤던 아마존 커피숍으로 커피를 마시러 들어간다.


 카오산 로드는 우리나라의 큰 재래시장과 같다. 가게와 노점들이 즐비해 있으며 은행도 들어와 있고 마사지 샵도 여러 개 있다. 낮에는 그저 평범한 시장거리로 보인다. 낮과 밤이 다르다고 하니 여기저기 구경을 다니다가 나중에 카오산 로드의 밤거리도 구경하기로 한다. 

여행을 하면 많은 사람들을 보고 만나게 된다. 각국의 서로 다른 나라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남자든 여자든 혼자서 다니는 사람도 많다. 또 젊은 연인들이 떠들며 지나가기도 하고 부부가 함께 다니기도 한다.

내 눈에 들어온 사람들 중 가장 보기 좋은 모습은 나이 든 노부부가 꼭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다.

이 분들은 떠들거나 크게 웃지도 않는다. 그냥 서로의 얼굴을 보고 조용히 얘기를 나누며 걸어간다. 그것도 빨리 걷지도 않고 새로운 곳의 세상을 보면서 천천히 걸어간다. 인생을 오래 산 사람들의 눈에는 급한 것이 없다. 어차피 흘러가고 바뀌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참 정겨운 모습이다. 많은 삶의 애환을 겪었을 테고, 살아오는 동안 인생의 단 맛 쓴 맛을 다 보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의 현실에서는 행복한 모습으로 서로 의지하며, 주름진 얼굴도 아름답게 보면서 손을 잡고 천천히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다. 참 보기가 좋다.

나도 저런 모습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다. 내 나이가 더 들어도 편안하고 행복한 그런 노부부로 살고 싶다. 


 오래전 보았던 감명 깊은 영화가 생각이 난다. '인생 후르츠'라는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다. 90세의 할아버지와 87세의 할머니가 살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 내게 결코 잊히지 않는 영화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도 그냥 잠을 자면서 맞이한다. 아니 죽은 것이 아니라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 뿐이다. 노부부의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고선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자고 가끔씩 이야기한다. 그래서일까

카오산 로드에서 함께 손잡고 걸어가는 저 서양인 노부부가 내 눈에 아름답게 비쳐만 진다.



 저녁은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맛집이 있어 거기에 가서 먹기로 한다. 한국인들이 여기 방콕으로 여행을 참 많이도 오는 모양이다. 맛집을 찾기 위해 검색을 해보면 그 수가 정말 많다. 모두 맛에는 일가견이 있는지 자세히도 적어 놓았다. 한 집을 고르기 위해선 꽤 많은 시간을 투자를 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뒤를 따라가면서 투덜대거나 짜증을 내지 않기로 약속했다. 가서 편안하게 태국 음식의 오묘한 맛을 보는 주제에 무슨 할 말이 많다고. 저녁도 그렇게 뒤만 따라갔는데 식탁 위에 나온 음식을 먹어보니 맛이 있다.

태국 음식은 세계적으로 맛이 있는 음식에 속한다. 태국 여행을 결정하고선 책을 찾아 펼쳐보니 그 속에 이런 글들이 적혀 있는 것을 봤다.


 외국 여행객들이 태국을 방문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동양의 이국적인 느낌과 향이 가득한 음식 때문'이라는 글을. 세계적인 수준까지 끌어올린 태국 음식의 문화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율브린너가 주연한 <왕과 나>의 배경도 바로 태국이다. 태국의 또 다른 명칭인 시암왕국을 그렸는데, 고집스럽고 강한 힘을 보여주는 왕의 모습이다. 그런 강함이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양세계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걸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음식도 독창적이며 다면적인 국민의 성격에 맞게 다양하게 발전하였을 것이다. 이 식탁 위에 놓인 음식에서도 빠지지 않고 들어가 있는 고수의 향도 그렇게 해서 향의  재료가 되었을지 모른다. 내 나름대로 온갖 추측을 하며 천천히 먹는다. 그러나 반찬 없이 달랑 그릇 하나에 담아 나오는 음식인지라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태국 음식은 우리와 달리 반찬이 없다. 주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한 곳에 다 넣어 요리를 하기 때문인지 아예 없다.


 다시 카오산 로드로 걸어간다. 한번 왔던 길이라서 그런지 이젠 제법 눈에 익는다. 폰으로 구글 맵을 켜지 않아도 잘 걸어간다. 우리도 그렇게 손을 잡고 카오산 로드의 밤거리를 여기저기 다니며 구경을 한다. 확실히 이곳 밤의 문화는 낮의 거리를 압도한다. 쏟아져 나온 외국 관광객들로 거리가 비좁을 지경이다. 조명의 불빛과 음악소리가 쿵쿵거리는 술집과 레스토랑들. 입구만 빼고선 앞을 가로막고 있는 노점들. 호객행위를 하는 가게의 직원들. 모두 하나가 되어 카오산 로드의 밤 문화에 휩쓸여 빙빙 돌아가고 있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이 거리를 방콕에 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라 말하는 모양이다.


 우리 속요에 보면 '삿갓 쓰고 도롱이 띠고 잠방이 입고...'라는 글이 나온다. 이는 비 오는 날 우리 농촌의 풍경을 읊은 것이다. 도롱이는 짚이나 띠 같은 풀로 촘촘하게 잇달아 엮어 만든 것으로, 빗물이 스며들지 않게 입는다. 또 줄거리 끝 부분은 그대로 드리운 채 끝이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는데, 빗물이 안으로 스며들 겨를도 없이 줄기를 따라 그대로 땅으로 흘러내리게 하기 위함이다. 길이 또한 우리 몸이 활동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엉덩이까지 내려오게 하였다. 흔히 농촌에서 비 오는 날 논이나 밭에 나가 일을 할 때 사용하였는데 삿갓도 함께 썼다. 머리에서 어깨너비 이상이 되는 삿갓을 함께 쓰면 지금의 우비 역할과 같은 것이 되었던 것이다.


 왁자지껄한 카오산 로드의 밤거리에 한 방울 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진다. 많은 사람들은 여기저기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다. 마사지숍에선 길거리 쪽으로 침구를 놓고 그 위에서 여종업원들이 손님들을 마사지한다. 

멋진 마케팅 전략이고 대단한 홍보효과를 가져온다. 모두 지나가면서 한 번씩 다 쳐다본다. 우리도 쳐다본다.

갑자기 옆에서 내 손을 잡고선 걸음을 재촉한다. 로띠를 사서 먹어봐야 한다고. 부근의 노점에서 로띠를 팔고 있다. 나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지만 바나나를 칼로 잘라 얇은 반죽 위에 얹고 구운 요리다. 그 위에 다시 쵸코렛을 입힌 뒤 종이 위에 얹어서 준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우리도 숙소에서 먹으려고 하나를 산다. 다시 과일주스 파는 곳에 서서 살까 말까 망설이며 구경을 한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의 굵기가 조금은 굵은 느낌이다. 그러나 아직 그때까진 사람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기에 우리도 걸음을 옮겨 다른 곳을 구경한다. 

마침내 동남아 스콜의 진면목을 느끼는 순간이랄까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거기에 번쩍하고 번개까지 치면서 천둥소리와 함께 그냥 퍼붓는다.

너무 놀라 눈을 들어보니 앞에 술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이기에 그냥 냅다 뛰었다. 시장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구경 나온 관광객과 줄지어 선 노점상들 그리고 침구에 누워 마사지받던 손님과 여종업원들 등등. 우리 두 사람은 건물 계단에 서서 그 광경을 다 지켜본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가 없다. 공자가 평생을 인(仁) 하라고 가르쳤지만 하늘은 아니 천지는 결코 인(仁) 하지 않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그 옛날 노자는 자신의 도덕경 5장에다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라고 이미 말하였다. 천지는 어질지 않고 만물을 짚으로 엮은 개처럼 여긴다고. 그 시대에 벌써 깨닫고 우리에게 던진 말이다. 자연을 무서워해야 공경할 줄 알고 공경할 줄 알아야 세상이 편안해진다. 지금처럼 인간이 마음대로 이 천지를 무시해서는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도 아주 무서운 하늘의 벌을 말이다.


 카오산 로드에서 한 손에 로띠를 들고 비를 맞으며 깨닫는 순간이다. 이번 비는 스콜이 아니라 몇 시간 동안 쏟아질 폭우다. 그 긴 시간을 기다릴 동안 삿갓에 도롱이가 그토록 그립게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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