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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상준 Oct 15. 2023

4화. 방수역에서 탄 열차

 비가 그치길 기다렸지만 결국 인내의 한계를 넘어섰는지라 할 수 없이 우산을 100밧을 주고 샀다. 우산 하나에 두 사람의 몸을 최대한 붙이며 호텔로 향한다. 우산을 쓰고 왔지만 옷은 비로 인해 제법 젖었기에, 호텔 문을 열고 들어오니 로비 카운터에서 직원들이 애처로운 듯 쳐다본다. 그래도 로티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가져와 방에서 맥주 안주로 맛있게 먹는다.

여행에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자주 발생한다. 아무리 체크하고 준비를 해도 할 수 없이 일어나는 상황에선 그냥 몸으로 맞아야 한다. 일단 맞아봐야 알 수가 있다. 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 배우고 다음 여행에선 피할 수 있다. 인생의 흐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아기가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 일어서 걷듯이 실패하고 쓰러져도 포기하지 않고 피드백하면서 다시 나아가야 성공을 한다. 대부분 중간에서 포기하고 손을 놓기 때문에 일어서지를 못한다. 때리는 매가 아파 너무 아파서 겁이 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도 카오산 로드에서 산 로티 하나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기에 안주로서 맛있게 먹질 않는가. 우습다. 그렇게 한바탕 웃고는 창가를 바라보니 밤비는 아직도 쏟아지고 있다.     


 아침에 비는 말끔히 그쳤고 따사로운 햇볕아래 모든 게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어제 문을 닫아 맛을 보지 못한 맛집, 그 닥터 어묵국숫집에서 아침을 먹기로 하고 걸음을 재촉한다. 조금 이른 시간에 온 덕분인지 장인 정신이 몸에 배어 있는 주인과도 기념사진을 찍는 여유를 가져본다.

어젯밤 의논 끝에 방콕을 떠나 치앙마이로 가기로 했다. 계속 비가 올 것 같아 여기서 시간만 허비하는 것 같아서다. 도심지인 방콕은 다시 들르기로 하고 한 달 살기의 성지라고 하는 치앙마이를 먼저 가기로.



 방수역(방수 그랜드 역 Bang Sue Grand)은 방수지역에 위치한 역으로 2021년 8월에 완공된 동남아시아에서 최대 규모의 역이다. 그전에는 방콕의 후아람퐁 역에서 모든 기차가 출발했다. 이젠 모든 장거리 철도 노선의 기점이자, 방콕 도시철도와 시내버스가 연계되어 있는 역이 방수역이다. 지하 1층과 지상 3층으로 1층에는 매표소와 대기실이 있고 2층에서 장거리 철도가 출발하고 있다.      

방콕에서 치앙마이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는 많이 있고 시간도 짧다. 구글맵이 조금 손에 익숙해 맛집과 여러 길 등을 이젠 제법 잘 찾아간다. 그런 일말의 자신감을 가진 탓인지 비행기를 두고 13시간이나 걸리는 기차 여행으로 가자고 한다. 기왕이면 색다른 여행도 좋지 않느냐고 하면서. 나는 그 말에 다시 등이 오싹해졌다. 그러나 뒤만 따라다니는 입장에선 더 이상의 의견은 소용이 없는 법이다.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고선 그 길로 방수역으로 향한다. 손에는 여전히 구글맵이 켜진 폰이 들려있다. 아무리 손에 조금은 익숙해진 폰 약도지만 역으로 가는 버스 타는 곳을 찾기란 만만치가 않다. 가다가 부딪치면 묻고 또 열심히 가다가 막히면 묻고 하기를 여러 번, 마침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다.

사람들이 내가 뱉은 짧은 몇 마디 영어를 겨우 알아듣고선 태국어와 영어를 섞어 가며 친절히 가르쳐준 덕분이다. 나중에는 답답한지 손짓 몸짓까지 다 동원해 가며 가르쳐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친절한가. 나 같으면 벌써 짜증을 내고 갔을 텐데. 태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보다 친절한 것 같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그랩이나 볼트로 차를 불러 타고 가면 편안하게 갈 수 있는 거리를 이렇게 고생을 하고 다닌다. 나는 심카드를 갈아 끼울 기회만 찾고 있다.   

  

 방수역은 정말 크고 넓다. 버스에서 내리면 철로를 가로질러 역으로 간다.  그런데 기차가 다니는 철로에는 역무원도 횡단기도 없다. 우리나라에선 상상하기조차 힘든 모습이다. 이런 위험한 곳을 각자가 알아서 건너라는 듯 방치해 놓고 있다니. 좌우로 연신 살피며 건너는데 조금은 이상한 느낌이 든다. 기차가 보이질 않는다. 서있는 기차도 없다. 분명 여기가 철도의 기점인데 이렇게 넓은 철로 위에 기차가 없다니. 앞에 가던 나를 갑자기 불러 세우더니 인증샷을 찍자고 한다. 나는 깜짝 놀라 쳐다본다. 아니 기차가 다니는 이 위험한 철로 위에서 사진을 찍자니 제정신이 있는 사람인지. 그러나 결국 여유롭게 포즈를 잡아가며 몇 장을 찍고 만다. 속에 들어있는 간은 이미 부풀 대로 부풀어 몸 밖으로 나와 있다.



 역이 워낙 넓고 큰 곳이라 안에 들어가서도 한참을 걸어 겨우 치앙마이로 가는 매표소 앞에 선다.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앞사람들이 금방 빠져나가는 바람에 구글번역기를 켜서 볼 시간도 없이 승무원 앞으로 갔다. 어떻게 말을 했는지 모른다. 냉방장치가 좋은 탓인지 바짝 긴장을 한 탓인지 땀은 이미 증발되어 사라지고 없다. 여권을 꺼내 주고받으며 떠들다 보니 어느새 손에는 표 2장이 쥐어져 있다. 

'파이팅!' 해냈다. 우린 두 손을 마주치며 큰 소리를 지른다.  나이 들어 걱정과 두려움만 배낭에 쑤셔 놓고 떠나왔는데 이렇게 할 수 있다니. 주위에 사람들이 보든 말든 상관이 없다. 갑자기 씩씩해진다. 자기 계발서에도 수없이 나오지만 사람이 자신감에 차 있으면 말과 행동에 여유가 생긴다. 그 여유에는 자존감이 묻어 있기에 더 아름답게만 보인다.    

 

 길에 서서 길에게 길을 묻는다고 답이 나오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그 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무모한 도전은 이렇게 시작이 되고 그 시작은 끝을 보일 것이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기 때문이다.  

   

 어제 예약한 표를 지갑에 꼭 챙겨 넣고 배낭을 메고 캐리어를 끌며 우리는 방수역에 도착했다. 어제는 에어컨 없는 버스를 탔지만 오늘은 운이 좋아 에어컨이 있는 버스를 탔다. 낮에 점심을 먹으면서 기차 안에서 먹을 볶음밥도 한 개를 테이크아웃 해서 들고 왔다. 기차 내에서 먹을 수 있고 또 재미도 있을 거라며 기어이 배낭 속에 넣고야 만다. 역에 2시간 정도 일찍 도착해 여유가 조금 있기에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갑자기 던킨 도너츠 가게 앞에 멈추고선 한참 서서 보고 있다. 그리곤 툭 던지는 말. 가격이 싸니 한 통을 사자고 한다. 한 통에 12개가 들어가는 데 186밧(약 7400원, 한국에 비해 너무 싸다)이라고 기차 안에서 먹자고 한다. 여자들의 가격을 보는 눈과 계산하는 머리 회전은 역시 놀랍다. 그렇게 짐을 또 추가로 들고선 개찰을 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층으로 올라간다. 문이 열리자 대기하고 있는 기차가 보이는데 정말 길다. 이제야 깨닫는다. 역으로 가는 철도 횡단로에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없는지를. 모든 기차가 역내 2층에서 출발하니 밖에서는 보이지가 않아 알 수가 없다. 인증샷 찍기를 너무 잘했다.     


 침대차는 잠을 자기 위한 차량이다. 그래서 야간에 운행하는 열차이고 거리도 수백 km 이상의 장거리를 달린다. 거리가 짧으면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기 때문이다. 비싼 고급 칸인 1~2인 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상하 2단씩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에도 옛날에 침대차가 있었다. 나도 타본 기억이 난다. 통일호와 무궁화호 두 개의 열차가 있었는데 통일호는 1998년 2월에 운행을 중단했고 무궁화호는 2004년 12월에 물러났다. 통일호 침대차는 침대별 구분이 커튼으로 되어 있고 사다리로 올라간다. 그러나 무궁화호 침대차는 고정형 파티션으로 되어 있다. 방수역에서 출발하는 치앙마이행 침대차는 커튼이 쳐져 있다. 우리나라 통일호 침대차에 가깝고 요금은 한 사람에 1038밧이다. 우리 두 사람은 모두 1층으로 하였기에 2층보단 조금 더 비쌌는지 모른다. 마주 보면서 테이블 위에 가져온 밥과 도넛을 놓고 저녁을 먹는다. 열차 안에서 먹는 재미도 제법 솔솔 하다. 기차가 서는 역마다 사람들이 올라타며 비어 있는 칸들을 하나씩 하나씩 채워나간다. 침대칸을 담당하는 여승무원이 좌석을 침대로 만들어주는 데, 그 솜씨가 너무나 빨라 놀란다. 숙련된 솜씨를 여지없이 발휘하는 그녀. 조금 있다가 우리도 부탁을 하고 이제 각자 복도를 사이에 두고 헤어진다. 

방수역발 치앙마이행 열차에 커튼이 쳐지면서 철마는 쉼 없이 그렇게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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