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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Feb 04. 2021

새 시어머니?

고아(孤兒)가 된 남편

어머니는 간암 말기로 간과 모든 뼈에 암이 퍼진 상태로 병이 발견된 6개월을 투병하시다 세상을 떠나셨다. 시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병환과 너무나 짧은 투병 생활, 어머니를 잃는 슬픔, 그리고 여태껏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방식의 시아버지의 만행은 내가 견디고 감당하기에도 벅차고 힘들었지만 남편 역시 자신이 상상하던 그 이상의 모습을 보았던 탓에 우리 집은 한동안 그 충격의 여파에서 벗어나기가 어려다. 


그리고 한 가지, 남편은 자신이 어머니의 마음이 되어 참담함을 느끼고 난 후에야 10년 전쯤에 나에게 저질렀던 자신의 '잘못'에 대한 진정한 반성을 하는 듯 느껴졌다.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는 배우자의 배신이 상대방에게 어떤 치명적인 결과를 만드는지 비로소 눈으로 확인하게 된 것이다.


남편은 결혼 한국 남자라면 누구든 그렇게 된다는 '지극한 효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평범하고 무뚝뚝한 아들이었다 하더라도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 만은 남 못지않은 자식이었다.

자랄 때 너무 엄하고 잔소리가 심했던 시아버지와 남편과의 오랜 불화로 남편 시아버지 사이 좋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어머니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만은 항상 드러나 보였다. 나에게 지나치게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지 자신이 알아서 어머니를 챙기고 찾아뵙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었다.

남편의 그런 마음도 알고 시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문제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 어머니를 함께 모시고 가려 애쓰고 자주 찾아뵙고 오래 머물려고 노력했었다.


그런 어머니가 평생을 아버지의 일로 마음 아파하셨으면서도 자식들에겐 단 한마디 내 비치지 않으시고 참고 참으시다 중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뜨셨으니 시아버지를 향한 남편의 분노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일이 생기고서야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이 되어, 그동안 마음고생하며 자신이 저질렀던 일로 병까지 얻으며 자신의 곁에 남아준 아내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던 것이다.


그 사건이 있은지 10여 년 만에야 처음으로 진심이 담긴 '사과'를 남편에게 받을 수 있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happily ever after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남편은 빠르게 자신의 본 성격을 찾아갔.




남편이 시아버지를 좋아하던 싫어하던, 내가 하고 싶던 아니든 간에 표면적으로는 혼자 사는 것으로 보이는 시아버지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둘 수는 없었다.

어쨌든 남편의 치부가 되는 얘기를 친정에 다 얘기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시아버지를 잘 챙겨드리라는 친정 부모님의 수도 없는 당부와 시가 친척 어르신들의 성화에 못 이겨 시아버지가 콕 집어 말씀하신 경기미 20kg과 국, 반찬들을 택배로 챙겨 보내드렸고 안부 전화도 잊지 않고 챙겨 드렸다.

어머니가 끝까지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떠나신 데는 어쨌든 (사후에 어떤 일이 생길지 예측을 못하셨겠지만요. 모르고 가신 게 천만다행이에요.) 혼자 남게 되실 아버님을 걱정하신 이유도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나로 인해 분란이 생기는 일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내가 할 도리는 다 해야겠다 마음먹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렇게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부재(不在)는 각자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조용히 지나가는 듯했다.




사람들은 말한다.

상처를 받았을 때 시간이 지나가면 그 상처는 어느덧 상흔으로 남아 어느 날 무뎌지는 순간이 온다고.

남편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오래 간직하며 많이 힘들어했었다. 어머니를 여읜 상처가 상흔이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 듯 보였다.

믿고 의지했던 형은 이민을 가고 자신을 끔찍이 아껴주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자신이 고아가 된 것 같다는 말을 자주 며 외로움을 못 견뎌했다.

교회를 함께 다니던 또래의 집사님들이 남편을 많이 위로해 주었고 친정 가족들과 주말마다 모여 친정집의 테라스에서 고기도 구워 먹고 근처를 산책하기도 다.

같은 동에 사는 제부와 함께 심야 영화를 자주 보고 맥주 한 캔을 마시고 들어오기도 하며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위로를 받으며 조금씩 어머니를 여읜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렇게 지내던 중에 아버님의 팔순 생일이 다가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햇수로 2년이 되는 해였다.


남편은 "아직 엄마 돌아가신 슬픔도 채 안 가셨는데 잔치는 무슨 잔치?! 그냥 식사나 하자고 말씀드릴게. 당신도 신경 쓰지 말고 있어"라고 했고 알겠다고 말은 했지만 잔치를 워낙 좋아하셔서 육순부터 잔치를 하셨던 아버님이 그냥 넘어가실까 하는 생각에 걱정이 안 될 수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님이 직접 내게 전화를 하셨다.


"어미야. 나다. ㅂㅂ이 전화받았는데.. 잔치까지는 필요 없고 너네  집 근처 거기 일식 레스토랑 있잖냐. 거기서 식사해도 지?"

"네. 아버님. 드시고 싶은 거 드세요."

"그럼 거기로 하 친구 두 사람만 데려가려고 하는데 괜찮지? 너무 비싼 코스 하지 말고.

지난번  생일이라고 미역국으로 상도 따로 차려주고 회로 케이크도 만들어주고 거기가 좋더라."

"네. 두 분만 더 오시면 돼요?  그럼 그렇게 예약해 놓을게요 그날 조심히 오세요."


남편에게 물으니 무슨 친구까지 초대하냐고 식구끼리만 먹자고 싫은 소리를 니 내게 전화를 하셨던 거였다.

그냥 왈가왈부하며 불편한 마음을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알겠다고 말하고 예약을 잡아 놓았다.

그래 봐야 1년에 번도 되지 않는 만남에 행복하지는 않더라도 조용하게 큰 문제없이 지나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아버님의 팔순이 되던 당일, 평소에 빵을 좋아하셨던 아버님을 생각해 작은 케이크를 하나 장만하고 나와 딸은 약속한 식당에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남편이 아버님과 친구 분들을 함께 모시고 왔다.

처음엔 근황 얘기를 나누고 며느리가 잘 챙겨 준다는 훈훈한? 얘기가 오가던 중에 아버님 친구분들이 술 한잔씩을 드시더니 갑자기 뜻밖의 말씀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요즘 자네들 아버님을 자주 만나고 지켜보는데 연세도 좀 있으시고 혼자 지내시는 게 많이 버거워 보이셔서 주변에서 여자분을 소개해 드려서 만나보게 됐어. 다행히 그 여자분도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고 이 참에 같이 살았으면 하고 바라는데 자네 아버님이 워낙 바른 분이시라 자식들 보기 민망하다고 하셔서 내가 대신 얘기한다고 이렇게 생일 때 같이 따라온 걸세"

"그러게. 아버님이 혼자 있는 거 보는 것도 영 불안하고 여자도 우리가 보니까 아주 참하시고 평판이 좋으신 분이야. 자네들은 같이 사니까 모르겠지만 아버님 혼자 계시는 게 얼마나 외롭고 안쓰러워 보이는지 아나? 그 집 자녀들은 다 찬성했다네. 자네들이 오케이 안 해도 어차피 같이 살기로 얘기됐지만 기왕이면 자네들도 좋다고 하고 왕래도 하면 더 좋고. 한 번 상견례도 하고. 알겠지? 내가 친구가 돼서 자네 아버지가 너무 안쓰러워 대신이라도 얘기하려고 이렇게 나온 거야."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벌리고 한참을 얘기를 듣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남편을 쳐다보았다.

남편의 얼굴은 빨갛다 못해 터질 것처럼 보였고 주먹을 불끈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상이라도 엎을 기세였다.

조용히 손을 뻗어 남편의 주먹 위에 얹었다.

그리고 시아버지에게 말을 했다.


"연세 많으시고 저희랑 떨어져 사시는데 잘하셨어요. 알겠습니다. 제가 따로 더 챙겨야 할 건  없는 거죠? 미국엔 아버님이 연락하세요."


내가 하는 얘기를 듣고 남편은 간신히 화를 가라앉히려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시아버지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말기암으로 간신히 6개월을 버티다 돌아가신 지 이제 겨우 햇수로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시아버지가 말하지 않았어도 함께 살고 있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고 (아무리 삼시세끼 해 먹는다 해도 1인 가구 혼자 20kg 쌀을 한 달에 소비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말입니다.) 모두들 알고도 모른 척 묵인하고 있었다.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부터 만나던 여자라는 걸 모르는 가족들은 없었다.

가족 중 누구와 성격 맞춰 사실 분도 아니고 연세는 있으셔서 다들 알지만 암묵적으로 용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렇지만 드러내지 않고 암암리에 묵인하는 것과 겉으로 드러내고 공표하고 인정(認定)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였다.

거기에 본인이 얘기하시는 것도 아니고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얘기를 하게 하였으니 본인도 창피한 건 아셨나 보다. 그리고 아예 반대 의견은 듣지 않겠다는 꼼수를 두신 것이기도 했다.

시아버지보다 16살이나 어리다는 그 여자분도, 어머니를 여읜 슬픔을 추스르지도 못한 자식에게 당신이 이제부터 다른 여자와 살 테니 두말 말고 인정하라는 시아버지도 다 내 예상 밖을 벗어나는 인간 군상들이었다.


아버님의 생일 모임을 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남편은 나에게 말했다.


"아버지에게 쌀 보내는 거, 반찬해 보내는 거 다 멈춰. 당신 고생시켜서 '새어머니'모시라는 거야!

그리고 당신은 아버지 전화받지 마.

평생을 엄마 속 썩이시더니.... 엄마 일찍 가시길 잘하신 거 같아. 더러운 꼴 더 안 보시고.

난 이제부터 고아야. 아버지도 없다고 생각하고 살 거야. 내 가족은 처가 식구들밖에 없어.

나는 고아야. 휴..."


그 후로 시아버진 내가 당신 아들을 꼬드겨서 당신과 아들 사이가 벌어졌다 생각하곤 단 한 번도 내가 아플 때던 입원했을 때던 죽었을 때던 눈길도 주지 않았다.


바라던 바였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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