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나루 Jan 20. 2021

아이가 '사춘기'로 말했다

아빠가 엄마를 아프게 한 거야! 아빠가 너무 싫어!!

남편이 부부간의 상도덕?을 어기는 짓을 벌였던 건 아이가 3살이 조금 지난 무렵이었다.

그 무렵 여러 기업에서 주 5일제 근무를 시범적으로 시행을 하기 시작했을 때였고 은행은 아직 토요일 오전 영업이 남아 있던 때였다.

내가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기 전 나는 토요일에 출근을 하고 남편 혼자 딸을 집에 데리고 있던지 아니면 시가에 딸을 데리고 가 있다가 가 퇴근 후 조금 쉬고 있으면 저녁을 먹고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물론 내가 시가로 퇴근하는 날도 많았다.

나중에서야 알게 됐지만 그때 남편은 내가 시가로 퇴근하지 않는 토요일엔 아이를 시가에 맡겨두고  낮에 항상 외출을 했었다고 한다.

그때  거지발싸개 같은 망할 놈의 something happening 이 일어나고 있었던 거였다.

시부모님은 전혀 모르는 사이에 아들이 벌이는 일의 공범자가 되어 있었다.




내가 그 일의 여파로 몸이 아파지기 시작하고

다시 원래 살던 동네로 이사 오게 된 후 가능하면 딸아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상처받지 않도록 노력을 했지만 아이들은 가장 먼저 안다.

집안의 공기가 바뀌고 흐름이 변하고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것을.


아무리 아이가 없는 곳, 시간에 싸우고 아이가 있을 땐 내색하려 하지 않아도 내 껌딱지였던 아이는 내  미세한 변화도 눈치채고는 항상 불안해했다.

엄마는 괜찮다고 아무리 얘기해 줘도 아이는 항상 아픈 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도록 잠자리를 내 옆에서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아무리 방을 새롭게 단장해 주어도 단장해 주는 그 순간만 즐길 뿐 항상 내 옆을 떠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아이의 마음에 큰 구멍을 내고 말았다. 지니는 항상 얘기했었다.


"내가 학교 간 사이에 엄마가 없어져 버릴 것 같아. 엄마. 절대 나만 두고 어디 가면 안 돼! 난 이 씨 아니야. 김 씨야.  지니야. 엄마 딸이니까 나 버리면 안 돼? 알겠지! 응? 응? 응?"

"걱정하지 마.지니야. 엄마가 우리 지니 두고 어딜 가.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랬지?

"지니. 지니도 엄마 제일 사랑해. 하늘만큼 땅만큼 바다만큼 우주만큼.... 제일 제일 최고로 사랑해"

"엄마는 지니가 엄마 사랑하는 거 백배, 천배만큼 더 많이 사랑하는데?^^.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엄만 지니 없인 아무 데도  못 가고 오라는데도  없어.ㅎ ㅎ ㅎ.  학교 끝나고 오기 전에 미니 핫도그 만들어 놓을게 걱정하지 말고 맘 편히 공부 열심히 하구와. 알았지?


나와 남편의 불화가 어린 딸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지니가 이럴수록 남편이 점점 미워지고 용서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내가 얼굴이 돌아가고 혀가 말렸던 사건은 아이가 4살이 넘은 때에 일어났던 일이었는데 아주 어릴 때 일어났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뇌리에 사진이 찍히듯 선명하게 남은 사건이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아이는 엄마가 아픈 것은 아빠가 엄마의 속을 썩여서 생긴 일이라고 굳게 믿는 듯했다.

우연한 기회에 2~3년쯤 후에 그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지니야, 그건 엄마가 회사 다니고 집안일도 하느라 힘들어서 그런 거지 아빠가 잘못한 게 아니야. 아빠한테 화내면 안 돼."


라고 얘기를 해주었는데도


"아니야, 그건 아빠 때문에 엄마가 아팠던 거야. 엄마가 그렇게 힘들고 아픈데.지니가 엄마 너무 아파서 가재 수건에 물 적셔서 입도 닦아주고 머리에도 올려줬는데 아빠가 술 먹고 늦게 왔어. 지니가 엄마 아프다고 무섭다고 빨리 오라고 했는데도 아빠 술 먹고 늦게 왔잖아.  아빠는 엄마랑 지니를 사랑하지 않나 봐"


라고 작은 이마의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얘기를 했다.

그렇게 얘기하는 딸의 마음이 너무 짐작이 되고도 남아 눈물이 흘러내렸다.

난 아이의 어깨를 당겨 꼭 안아주며 다시 얘기해 주었다.


"지니야, 아빠는 엄마가 많이 아프니까 병원 갈 때 쓸 돈 더 벌어 오느라고 늦는 거야. 그리고 아빠가 지니랑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맨날 지니랑 놀이터 가주고 자전거도 같이 타 주고 편의점도 같이 가주고 여행도 자주 가고 지니가 해달라는 거 다 해주잖아. 아빠 좋은 사람이야"


아이의 마음에 조금의 상처도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난 남편의 허물을 쓸어 덮을 수밖에 없었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고 하는데 어릴 때야 말 몇 마디로 아이를 달래고 감출 수 있다고 하지만 점점 커가는 아이를 바라보며 어느 날엔간 내가 하는 어떤 말도 아이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에 남편의 철없는 행동이 멈추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바람은 항상 바람으로만 끝날 때가 더욱 많다는 걸 살면 살수록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됐을 무렵에 내가 '세균성 뇌수막염'에 걸리면서(제가 입원한 20일간 떨어져 지냈어요. 퇴원 앞둔 3일 전쯤 한번 보러 왔었고요.) 나에 대한 아이의 집착과 걱정은 더욱 커져갔다.




딸과 나는 비밀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물론 비밀을 만들고 싶다면 굳이 캐묻진 않습니다. 그 비밀을 이모나 숙모는 알고 있었으니까요^^. 예전엔)

아이가 돌 때부터 7살 무렵까지 아데노이드 비데증과 중이염, 편도선염, 후두염, 부비동염, 비염 등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1년에 10달 병원 신세를 져야 했었다.

심할 때는 눕히면 숨을 쉬지 못해 열이 펄펄 끓는 애를 밤새 업고 거실과 주방을 돌아다고 내가 너무 힘들 땐 소파 위에 쿠션을 여러 개 올리고 나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10분에서 15분씩 쪽잠을 자며 아픈 아이를 케어했었다.

아이는 숨을 쉬는 게 불편해 입으로 숨을 몰아쉬어 입술이 온통 부르트고 찢어져 피가 났었다. 그런 아이가 너무 안쓰럽고 안타까워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를 업고 1~100까지 숫자를 세거나 다시 하나부터 백까지 숫자를 세고 집에 벽에 걸려있는 액자의 그림 감상평을 읊어대고 동화책 읽어줬던 것을 기억해 얘기를 지어내고 내가 하루 종일 은행에서 겪었던 일을 얘기하다 보면 날이 훤하게 밝아오곤 했었다.

그때 조용조용 얘기해 주던 내 목소리를 좋아하던 아이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자신도 그날 겪었던 하루 일과를 미주알고주알 종알거리며 얘기해 주길 좋아했다.


남편이 술접대를 명목으로 바깥으로 돌고 일주일에 네다섯 번씩 늦고 어쩌다 일찍 오는 날은 피곤하다고 잠자기 바빠하면 할수록 나와 아이의 심리적인 거리와 물리적인 거리는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아빠에게 쌀쌀맞아지기 시작했다.

성적으로는 한 번도 야단 친척이 없어도 예절과 버르장머리로는 여러 번 엄하게 주의를 주고 때로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야단을 쳤었기 때문에 어른들 앞에서 좀처럼 실수하는 법이 없던 지니가 아빠한테 얘기할 때 친구한테 얘기하는 것보다 못하게 얘기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것을 넘어서 예전에 양반이 노비를 대하듯 무시하고 아예 상대를 안 하는 경우까지 종종 있는 데다  어떨 땐 경멸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까지 해서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경고를 하고 주의를 줘도 소용이 없었다.

심하게 야단을 치면 오히려 아빠에게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지니는 나중에 사춘기가 더 심해졌을 때도 교회 어른들을 만나 인사가 부족했다 여기면 지나가신 분을 다시 쫓아가 웃으며 큰소리로 인사하고 오 그런 아이인데... 도무지 어찌해야 할 바를 알지 못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아이의 사춘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는 나까지 원망하기 시작했다.


"엄마! 왜 아빠하고 이혼하지 않았어? 진작에 아빠하고 이혼했으면 엄마 이렇게 아프지도 않았을 거 아니야. 아빠는 나쁘고 엄마는 미워. 다 싫어. 다 꼴 보기 싫어"


지니의 상처는 벌어질 대로 벌어져 있었다.


어떻게 아이를 위로하고 엇나가는 마음을 붙잡아야 할지 감도 못 잡고 있을 때 시가에서 연락이 왔다.


"나다, 아버지. 네 시엄마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에 '허벅지 뼈(대퇴골절)'가 부러져 응급수술 했다. 지금 바로 병원으로 와라"


아버지의 전화였다.


가슴속의 심장이 다시 기차처럼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숨도 못 쉴 만큼.




to be continue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