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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Jan 15. 2021

누구보다 딸을 사랑하는? 남편

하지만 자신의 need가 더 중요한 사람

남편과 연애를 할 때  남편은 여러 가지로 내 눈에 콩깍지를 씌우게 만들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내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었던 건 아기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예뻐하는 모습이었다.


나보다 다섯 살 연상이었던 남편의 친구 중에는 우리가 연애를 시작할 무렵 이른 결혼을 해 이미 돌이 지난 딸아이를 가진 친구 부부가 있었다.

친구들과 모임이 있을 때  그 작고 사랑스러운 아기는 항상 우리 커플의 몫이었다.

나도, 남편도 아기를 잘 다루(남편 형님의 아이들이 둘 다 딸이었어요. 조카들 사랑이 지극했죠.) 엄청 좋아하고 잘 놀아 주었.

울던 아기들도 남편이 안아주면 거짓말처럼 울음을 그쳤고 남편이 아기들과 놀아주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중에 우리가 함께 낳은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할지 눈앞에 그린 것처럼 보였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자연스레 나는 '내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반드시 이 사람과 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더 단단히 먹었던 것 같다.




남편과 결혼을 하고 신혼 생활을 어느 정도 즐긴 이후에 아기를 가지려고 노력했을 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아기는 쉽게 들어서지 않았다.

남편이 나보다 다섯 살이나 연상 이어서 시가에서는 아이를 기다리는 눈치였지만 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편하게 여기자 마음을 먹었고 런 마음을 먹기가 무섭게 아기가 생겼다.


시가에선 나를 보기만 하면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요구를 했다. 형님이 한 분 계셨지만 딸 만 둘이 있었던 이유로 더더욱 나에게 기대를 걸고 계셨던 거였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다면 거짓말 이겠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도 아니었고 게다가  남편은 오히려 딸을 원했다. 그리고 당사자였던 나는 아들이던 딸이던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 정도로 극심한 입덧에 시달리고 있었다.

물만 마셔도 토하고 음식을 전혀 먹을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TV에 음식이 나오는 장면만 나와도 화장실로 뛰어가야 했다.

달 사이에 5kg이 빠져 아이에게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하여 적지 않은 기간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냄새에 유독 민감했던 내가 퇴원 후 친정에서 잠시 요양을 하고 있는 기간 중에 쉬고 있는 방 안의 문에 방한용 스티로폼까지 덧대 음식 냄새가 가능한  으로 흘러 들어오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고 한겨울이 다가오던 그때에 온 집안의 문이라는 문, 창문 다 열어놓고 친정엄마는 겨울 파카를 꺼내 으시고 음식을 만드셔야 할 정도로 애를 쓰셨다. 

거기에 대고 아들 타령을 하고 있었으니 남편이 생각하기에도 가당치도 않은 소리라 여겼던 것 같았다. 내가 친정에서 쉬고 있는 동안은 어떤 말도 귀에 들리지 않도록 신경을 써주기도 했었다. 결혼하고 처음 대한 남편의 철든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남편이 크게 달라진 건 아니었다.

남편은 주중에 한 번 친정에 잠깐 들러 저녁 식사를 하고는 내가 누워있는 방에 들어와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앉은 내 얼굴에 대고 트림을 해대서 지도 못한 속이 뒤집어져 노란 위액까지 다 토해내게 만들었다.(조심성과 배려가 부족한 게 항상 아쉬웠습니다.. 사람 만들어 사느라 고생 막심했네요.) 

너무 보고 싶고 의지하고 싶었던 남편의 무심함에 상처를 받았었다.

그리곤 남편은 주말엔 꼭 시댁으로 건너가 혼자 지내다 오는 것이었다.

차라리 주중에 출퇴근을 시가에서 하고 주말에 아직 신혼인 임신한 아내와 있어줘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도대체 머리는 장식인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려줘야 하는 건지...

시가엔  그 정도 얘기도 해줄 사람도 없었던 건지...)

섭섭하고 속상한 마음과 괴로운 몸상태가 겹쳐 임신 기간 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게다가 7개월쯤 됐을 무렵엔 조산기가 심해 입원을 하던지 아니면 집에서 꼼도 하지 말고 누워 있으라는 병원의 얘기에 이제 막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봄날 베란다 밖을 내다보며 숱하게 눈물짓기도 했었다. 어서 빨리 출산을 하고 가벼운 몸으로 건강한 아이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다.


하지만 마지막 막달 까지도 구토는 멈추지 않았고 몸무게도 50kg이 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지니를 낳던 날도 32시간의 진통을 거쳐 난산으로 고생을 해야 했었다.

그때는 가족 분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 홀로 분만실에 누워 옆 침대의 산모들이 여럿이 바뀌어 나가는 것을 보며 지니 이후로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었다.

아이에게 들려주는 내 첫 목소리가 비명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죽을힘을 다해 소리를 내지 않고 참았다. 진통 중간에 양수가 터져 다 새어 나오는 바람에 정작 분만을 해야 할 당시에는 남자 간호사가 배 위로 올라와 진통과 함께 구령에 맞춰 배를 아래로 밀어 내렸다. 간신히 아이가 나올 무렵엔 너무 오랜 시간 진통하느라 기력을 다 써버려 그 몇 초의 사이에도 잠깐씩 기절을 반복해야 했다.

마침내 지니의 머리가 모습을 드러내고 마지막 힘을 주었을 때 아기의 어깨에 걸려 미리 절개해 두었던 회음부 부분에서 엉덩이 쪽으로 피부가 더 찢어져 아이를 낳은 후 후처치 때에 마취가 풀린 상태에서 봉합을 해야 했다.(지니를 낳는 것보다 더 아팠다면 거짓말 이려나요?)


그렇게 우여곡절 많은 극한의 시간을 견뎌 3.2kg의 건강한 내 딸, 내 목숨보다 중요한, 내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한 일인 우리 딸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들로 난 그때 아이는 하나만 낳아 열심히 잘 기르기로 결심했다.

그 이후로 시가에서 아들을 더 낳아야 한다는 어떤 소리에도 눈을 감고 귀를 막아 버렸다.

어차피 아이를 가지고 낳는 것도 나요, 육아를 도와주실 것도 친정뿐일 것이 분명한 상황에 '아이는 자신이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시가의 어리석은 옛말 따위에 흔들 리기엔 너무 많은 고생을 한 탓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대로 남편은 딸이 어릴 땐 딸을 미치도록 사랑했다.

아기와 함께 있는 시간에는 온 정신을 아기에게 맞추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춰서 아이 스스로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었다.

시가에서 무리한 부탁을 하는 경우에 그것이 내가 양보해야 하는 경우에는 당연한 듯 진행되어도 아이가 불편한 듯한 일이 되어버리면 내가 말할 것도 없이 남편 선에서 단칼에 거절되었고 아이와 최선을 다해 몸으로 놀아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몸으로 체득해야 하는 운동들 예를 들어 자전거나, 롤러 블레이드, 기타 등등.... 모든 것들은 아빠와 함께 그날 안에 마스터를 하고야 말 정도로 집념과 끈기가 있는 친구 같은 부녀였다.


어느 순 간부 턴가는 아이가 낳은 엄마보다 아빠에게 더 애착형성이 더 잘 되어 있는 듯 보여 속으로 질투심 비슷한 게 생기기도 했었다.


조금은 부족하고 모자란 듯한 우리 가정이 이렇게 완성이 되는구나 싶은 마음이 들어 한시름 놓아 갈 무렵 남편이 저지른 문제의 그 사건(affair)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 것이었다.


그 이후로 내가 아파지고 남편이 고집하는 자신만의 시간과  이기적인 행동들, 덩치만 큰 어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덜 자란 아이처럼 보이는 행동들로 인한 균열이 아이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기 시작했다.


우리 가정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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