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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Feb 08. 2021

눈물의 어부바로 키운 딸

"그저 건강하게만 커라. 엄마가 지켜 줄게"

딸은 태어났을 당시에 3,27kg의 정상 몸무게로 손가락 10개, 발가락 10개 하나도 빠짐없이 건강하고 예쁜 모습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동네에 소문이 짜~하게 퍼질 정도로 요란했던 내 입덧 탓이었는지(7주가 되자마자 구토가 시작되어 물만 마셔도 먹은 양의 두배 이상을 토해내고 온갖 냄새에 예민해져 당시 아파트였지만 비교적 넓었던 친정집 안방에 문을 꽁꽁 닫고 누워 있어도 식구 중 누군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은 것을 알만큼 심한 토덧에 시달렸습니다.

오죽하면 TV에 나온 음식 사진만 봐도 화장실로 달려가 온몸의 근육이 덜덜 떨리도록, 토하다 토하다 못해 옅은 갈색의 쓴 물까지 뱉어 내도록 심한 구토에 막달까지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러다가 정말 죽겠구나 싶을 때 아기를  낳았죠. 뭘 해도 끝장을 보고 튀어야 했나 봅니다.ㅎㅎ)

태열과 아토피, 여러 가지 호흡기 질환, 중이염,아데노이드 비대증 등으로 백일이 지난 무렵부터 7살이 되던 해까지 1년에 10달 정도는 병원을 제 집처럼 들락 거렸다.

낮에는 동네 소아과로, 밤에는 큰 병원의 응급실로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어떤 날은 큰 비가 쏟아지고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둡고 무서운 빗속을 뚫고 한밤중에 응급실로 내달리고, 또 어떤 날은 아기 옷은 물론이고 내 옷이며 차 바닥에 온통 아기의 토사물을 잔뜩 흩뿌린 채로 미처 닦을 새도 없이 응급실로 안고 들어가 예진을 보는 순간 인턴 선생님의 가운 앞에 탈수를 걱정해 먹였던 보리차와 우유를 뿜어내는 날도 있었다.(그 의사분껜 정말 죄송했었.ㅠ)

아이가 4살 되던 때부턴 우리 집은 IMF의 영향을 받아 가계 경제에 심하게 타격을 입고 다시 직장 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턴 친정 엄마의 도움이 없었다면 딸이 지금처럼  자라긴 어려웠을 것이다.




호흡기 질환과 중이염, 아데노이드 문제가 상 그렇듯 증세가 심해지면 우선 고열이 나기 시작하고 코로 숨을 쉬는 것을 힘들어하고 기침과 가래, 콧물 때문에 잠을 재우는 것이 엄청 어려워진다.

그래서 누우면 숨을 쉬는 것이 어려워 지기 때문에 아이를 세워서 안던지 아니면 항상 업고 있어야 했다.

고열 때문에 유모차에 누이려고 해도 아프면 엄마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남편은 아이와 놀아주는 것은 백점인 아빠였지만 아이가 아플 때는 약을 먹일 줄도 음식을 먹일 줄도 모르고 쩔쩔매기 일쑤였기 때문에 한번 아이가 아프기 시작하면 일주일이던 한 달이던 낮에는 친정 엄마가, 밤에는 내가 돌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고열 때문에 입원을 하거나 중이염 수술, 아데노이드 수술, 축농증 수술 같이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할 경우엔 단 하루도 나와 교대를 해서 나를 쉬게 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날짜가 얼마가 걸리던 회사에 휴가를 내야 하는  사람은 언제나 나였고 퇴근 후에 병원에 들러 2~3시간, 주말에 반나절을 나와 함께 돌보는 것이 다였다.

그마저도 회식이나 갑작스러운 저녁식사 약속으로  오지 않는 날도 있어 지치고 힘든 나에게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시가 쪽에선 시아버지도, 시아주버니도 형님도 단 한 번도 들여다보는 법이 없었고 어머니만 한두 번씩 다녀 가시는 게 다였다.

우리 ♥♥이가 아들이었더래도 그랬을까 하는 마음에 항상 속이 상했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오는 만큼 가는 법이다.(전 항상 믿어요.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인과응보'가 있을 거라고요. '원수를 사랑하라'하셨지만 그들이 제 원수는 아니니 딱밤 한대 정도는 때려 주시지 않을까요?^^)

애가 닳아 병원 문턱이 닳도록 병문안을 오며 뭐든지 딸이 먹을 만한 것, 마실 만한 것, 가지고 놀만한 장난감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은 오로지 친정 식구들 뿐이었다.

아이가 아프기 시작하면서부터 함께 돌보던 친정 엄마는 아이가 입원을 하게 되면 결국엔 병원에서 감기 같은 것이 옮아 몸져눕게 되시고 남는 건 항상 나와 딸 단 둘 뿐이었다.






♥♥이는 울음 끝이 짧은 아이였다.

크게 떼를 쓰거나 짜증을 부리거나 진이 빠지도록 울어서 지치게 하는 법 없이 항상 생글 거리며 잘 노는 아이였다.

다만, 어릴 때부터 일찍 떼어놓고 맞벌이를 하느라 오랜 시간 떨어져 있던 탓이 었는지 엄마 껌딱지 마냥 항상 엄마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가만히 놀다가도 자주, 아주 자주 내 볼을 그 작은 두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엄마 예뻐. 엄마 집에 꼭 올 거지? ◇◇이가 엄마 사랑해. 엄마 냄새 좋아. 안아줘요"


그 말을 들으면 항상 가슴이 아렸다.

출근하는 엄마가 돌아오지 않을까 항상 불안한 마음인 거 같았다.

 매일 꼭 안아주고 아이가 원하는 만큼 사랑한다고 얘기해 줬었다.




아이가 아프면 뉘어서 재울 수가 없었다.

아무리 가습기를  틀어놓고 빨래를 잔뜩 해서 방안에 빽빽이 걸어놔도 아이의 코와 입은 잔뜩 말라 헐고 피가 났고 누런 콧물은 줄줄 흐르고 귀에선 염증이 생겨 물과 고름이 같이 흘렀다.

항상 열이 39°C 가 넘었고 해열제는 듣지 않았다.

집에서 견디다 못해 새벽 시간에 응급실로 날아갔고 다시 입원을 하여 맞는 항생제를 찾고 그게 효과를 발휘할 때까지 아이를 업고 밤새 병실 밖 복도를 천천히 돌고 또 돌며 아이를 조금이라도 재우려고 애썼다.

너무 지치고 힘들어 졸면서 걷고 울면서 걸었다.

늦은 밤이라 병실 밖 복도 조명이 어두워서 다행이라 여다.

눈물을 훔칠 새도 없이 온 얼굴에 눈물이 범벅이 되도록 울었다.

너무 흐느끼면 몸이 들썩거려 내가 우는 걸 아이가 알게 될까봐 몸에 잔뜩 힘을 주느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힘들어 졌다.

들 자고 있는 새벽 시간이라 소리도 낼 수가 없어 이를 앙다물고 간신히 가끔 '딸꾹질'같은소리만 내는 걸로 참을 수 있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왜 나만 이렇게 고단하지?

이번엔 뭐라고 말하고 휴가를 내야 되나? 휴가가 남아 있긴 한가?

휴가 안 내주면 그깟 은행 그만 두지 뭐. 우리 ◇◇이가 이렇게 아픈데....

다 나 때문이야.

임신했을 때 내가 못 먹어서 애기가 이렇게 아픈 거야.

엄마 잘못 만나서.... 안쓰런 내 새끼...'   


아침 식사가 나올 시간이 다 돼서야 열이 조금  내리고 ♥♥이는 간신히 잠이 들었고 개와 담요로 상체를 높여주고 뉘어 몇 시간 만에 침대 옆에 앉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나를 지켜보던 옆 침대의 아기 엄마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 저기... 괜찮으세요? 아기 제가 깨는지 보고 있을 테니까 세수라도 하고 오실래요? 많이 힘드시죠?"


너무 피곤하고 지쳐 누구든 말을 걸어오는 것이 귀찮지만 내 눈이 빨갛게 부은 것을 보고 말을 건네 는가 보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고 우리가 입원한 방 아기들 그 누구도 이보다 나아 보이는 아이는 없었기 때문에 그 와중에도 예의 바르게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금방 친정 엄마 오실 거예요. 고맙습니다."


그랬더니 맞은편에 한 천식으로 가습 텐트 같은 것에 아이가 누워있는 엄마가 냉장고에서 주스 한 캔을 꺼내 내게 건네주면서 우리 침대에 붙어 있는 딸의 이름을 보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너무 힘드신 거 같은데 주제넘은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기운 좀 내시라고.... ♥♥엄마 지금 많이 힘드시죠?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밤새 몇 시간을 업고 있었으니...

그런데 우리 아기들 업어 줄 수 있는 시간 그렇게 많지 않아요. 조금만 더 크면 업어주고 싶어도 못 업어 주거든요. 엄마가 많이 힘들지만 업어주는 것만큼 아이한테 안정감 주는 스킨십이 잘 없대요. 힘들면 돌아가면서 도와 줄테니까 조금만 기운 내요"


너무 힘들어서 잔뜩 힘을 주고 있던 몸과 마음이 순식간에 몰캉 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새벽 시간에 혼자 피곤한고 지친 몸으로 몇 년째 진전 없이 아픈 아이 때문에 힘들어 울던 내가 부끄러웠다.

거기에 입원해 있던 아이들은 다들 심장 판막에 구멍이 있거나  천식이 심해 그 텐트 바깥으로는 나올 생각을 못하거나 그 두 가지보다 더 아픈 아이들도 있는데  그 엄마들이 나를 위로해주고 있었다.

물론 아픈 것에 경중이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알지만 마음에 여유가 없어 불편한 몸 때문에 칭얼대는 아이에게 "자야지 열이 내리지"라고 짜증도 부렸 마음도 반성하게 됐다.


아무리 부모라도 한결같은 마음을 유지하는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입원기간 내내 아픈 아이를 돌보는 씩씩한 전사 같은 엄마들을 보면서 생각했었다.

'내게 어떤 순간이 와도 ♥♥이가 엄마를 필요로 할때가 오면 나는 최선을 다해 지켜주고 네 옆에 엄마가 있음을 알려 주어야 겠다'


그리고 22년 뒤인 지금 눈물의 어부바로 키운 딸이 엄마를 안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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