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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Jun 28. 2022

말의 무게

진심 어린 사과

"내가 거기까지 갈게. 내가 당신한테 갈게.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기다리기만 해. 

말로 하는 약속은 오늘이 마지막이야.

내 행동이 달라지는 걸 지켜보기만 해. 당신이 나를 기다려 주고 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아서 미안해 여보.

나같이 못난 새끼 기다려 주느라 정말 고생 많았어.

말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심히 살게. 나한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정말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안 될까?

정말 미안해 여보!"


내가 생각해도 난 참 모질지 못하다 해야 하나 어리석다 해야 하나 이혼하려 마음을 먹었을 때 그냥 바로 갈라섰어야 했던 게 정답이 아닐까 수십 번 수백 번을 되뇌어 생각을 하고 또 했었다. 그랬다면 27년이라는 긴 세월을 인내하며  달라질 것을 믿고 기회를 주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진 않았 것이다. 또 이렇게 심하게 아프지 않았을 거란 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 긴 세월 동안 남편이 한 집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던 순간이 차고 넘쳤었다. 하지만 한없이 차가운 말로 마지막을 선고하고 집을 구해 나갈 잠시의 유예기간을 갖는 시간 동안 보인 남편의 쥐똥만큼의 성실해 보이는 모습과 없는 말솜씨로 진심을 전하려고 애쓰는 모습에 꽝꽝 얼어붙어 을 둥 말  했던 내 마음의 저 밑바닥 어디쯤 쩌적하며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만큼 남편은 진심을 다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글이든 말이든 청산유수로 내뱉진 못하더라도 진심이 담겨 있기만 하다면 그것엔 묵직한 울림이 있기 마련이다. 

남편의 말에 그 묵직한 울림 있는 것처럼 느껴 상처 입고 지쳐 있던  마음이 잠시 흔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울컥' 하려는 마음을 잠시 다독이고 남편에게 얘기를 시작했다.


"내가 왜? 내가 왜 그래 줘야 하는데?

내가 27년 동안 수 백 번을 말하고 또 말해도 동네 개가 짖는 것만도 못하게 생각할 땐 언제고 헤어질 결심 확고해진 이제야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내가 달간을 입을 다물어 버리고 그림자 취급하니까 이제 정말 그렇게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야?

내가 그렇게 애원하고 달래고 기다리고 참고 하다못해 당신 때문에 병 들고 가족까지 날 버린 이 마당에서도 날 좀 보라고 할 땐 신경도 안 쓰다가 이제 끝이다 마음 결정하니 당신이 매달리네. 인생은 참 아이러니해.

진작에 그랬어야지. 내가 이렇게 아프기 전에. 아니면 아프게 됐을 때라도 측은히 여기고 돌봤어야지.

어린 딸한테만 모든 짐  다 지우고 돈만 벌어다 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여보. 우린 진작에 끝났어. 다 망가진 관계를 나  혼자 안간힘 쓰면서 억지로 끌고 온 거야.

내가 누누이 얘기했는데도 듣지 않다가 당신 그 사실을 지금, 이제야 알게 된 거라니까."


화를 내지 않고, 흥분하지도 않고, 조용히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는 나를 보며 남편의 얼굴은 점점 울상이 되어갔다.

마치 시골 오일에서 엄마 손을 놓치고 놀란 마음에  어리둥절해하는 어린아이의 얼굴과 같아 보였다.


"여보, 제발! 당신이 보라고 했던 영상도 다 보고 빠지지 않고 보면서 댓글도 달았고 그거 보면서 반성 많이 했어.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도 깨달았고. 물론 내가 한 번에 확 달라지진 않겠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할게."

"난 다시 돌이킬 생각 없어. 당신이 몇 달 겪은 그 외로운 상황을 난 당신하고 결혼하고 매 순간, 매일을 혼자 견뎠어.

내가 당신한테 얘기하던 그때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겪어보고 나니 이제야 끔찍한 걸 알았어? 내가 겪은 건 27년이 넘었고 당신은 이제 겨우 6개월 조금 넘게 겪은 거뿐인데. 

 억울함과 속상함은 어떻게 풀어?

보라고 했던 유튜브 영상은 잘 보고 댓글도 보기 좋게 잘 달았더라.

남이 하는 말은 다 쉬워 보이지. 그리고 남한테는 다 그렇게 다정하게 잘하지.

그리고 삶이 그렇게 교과서에 나오는 것 마냥 간단하고 쉽기만 한가? 댓글은 그럴듯하게 달아 놨으면서 행동은 왜 그럴듯하게 못하는 건데?

모든 게 당신 탓은 아닐지 모르지만 부부라면 서로 의지하고 보살폈어야지.

좋은 일이 있을 때만 '하하 호호' 하고 힘든 일이 생기면  그때마다 도망쳐서 당신 스스로만 챙길 거였으면 아예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지.

이런 얘기 또 되풀이하기 싫어. 그만하고 싶어. 아니 그만할 거야. 내 마음이 돌아서지 않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집부터 구해."

"아니야. 여보. 내가 갈 데가 어디 있어. 내가 당신하고 ◇◇이 말곤 가족도 없는 사람인데. 정말 달라질 거야. 지난 몇 개월이 얼마나 끔찍했는데.... 지켜보고 결정해. 제발. 그동안 정말 미안했어. 내가 많이 노력할게. 용서하기 어려우면 천천히 당신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해. 이번엔 내가 참고 기다릴게. 많이 미안하고 고마워."


이사하던 날 이후로 몇 개월간 남편을 문간방의 그림자 취급을 하면서 처음엔 마음 한편에 불편함과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여태껏 누려보지 못했던 홀가분한 평안이 내게도 잠시나마 찾아왔다.

비록 단 한순간도 통증에 놓여 나지 못하는 몸뚱이에 갇힌 정신과 마음에 따르는 고통이야 잊을 수 없다 해도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내가 작정하기만 한다면 뭐든 가능하지 않은 일이 없겠다는 생각에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로 인해 망가졌던 모든 것들에 대한 아쉬움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 잠시의 평안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다시 한번'이라는 기회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잠시 숨을 고르던 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그러면 내가 평소에 말했던 대로 할 수 있어? 그리고 내가 더 바라는 대로 할 수도 있다는 거지?"

"당연하지! 평소에 말했던 건 내가 꾸준히 노력할게. 그리고 새로운 건 자꾸 얘기해. 내가 깜빡하거든. 그런데 지키려고 노력할게"

"알겠어. 그럼 내가... 다시 각해 볼게."


무려 6개월 하고도 20 여일이 지난 후에 이루어진 극적인 타결이었다.


하지만 나는 남편의 말을 한마디도 믿지 않았다. 물론 남편을 완전히 용서하지도 않았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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